봄날의 연주

by 시월

6월 20일, 저는 지금 봄날의 공원에 서 있습니다. 아마도 제 앞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을 테지요. 한 할머니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빛을 느끼고 있겠지요. 푸른 잔디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웃는 한 쌍의 커플도 있는 듯합니다. 아,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잔디 위를 뛰어 다니고도 있네요. 턱, 턱. 가벼운 발소리가 들립니다. 아이를 잡으려는 부모의 말소리도 들립니다.


저는 제 어깨에 매달려 있는 짙은 갈색의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냅니다. 바이올린을 잠시 왼발 아래 내려놓고 활에 송진을 바릅니다. 저는 주로 위아래로 세 번 바릅니다. 나름의 습관인 셈이죠. 다시 바이올린을 들어 소리를 확인해봅니다. 작은 공원에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소리에 소란했던 제 주위가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어떤 곡을 연주할지 생각해봅니다. 봄이니 이에 어울리는 곡이 좋겠습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을 연주하기로 정했습니다. 이 곡의 별명이 <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사람들이 다시 대화를 나누고 있네요. 어서 연주를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합니다. 연주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다시 조용해짐을 느낍니다. 제 연주를 듣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가끔은 누가 얘기해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제 연주를 듣는 이들의 표정이 어떠한지, 제 연주와 날씨가 퍽 잘 어울리는지 전해주는 이가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저는 그저 상상만 하게 되니까요. 그들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안다면 그에 맞는 연주를 해줄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그저 이들의 말소리, 웃음소리에 집중하며 연주를 이어나갈 뿐입니다. 이들이 제 연주에 흠뻑 빠져들기를 바라면서요.


노래가 차츰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봄의 생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슬프고 고달프게 느껴집니다. 어쩐지 오늘은 그날이 떠오르네요. 제가 더 이상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작년 6월 20일 말입니다. 그날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랜만에 빵을 먹은 것이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오랜만에 상사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문제였을까요. 한동안은 그 날을 복기하며 평소와는 달랐던 부분들을 바꿔보았습니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나왔더라면, 업무에서 실수를 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고요.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행동들을 바꿔도 결국 저는 교통사고가 났던 5시 34분에, 그 횡단보도에 서 있었습니다.


이제 연주가 차츰 마무리됩니다. 폴 고갱이 그런 말을 했다지요. ‘나는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고요. 눈을 잃은 뒤에야 고갱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알았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눈을 한 번 감아보세요. 옆 사람이 머리카락을 넘기는 소리, 바람에 옷이 스치는 소리, 어쩌면 해가 내리쬐는 소리까지 들려올 테니까요. 저는 그렇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음을 연주하자 어딘가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느끼며, 저는 이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작년의 오늘과는 다른, 행복한 날입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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