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이 정숙의 집에 간 건 거의 두 달 만이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는 이유로 정숙이 점차 미영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탓이었다. 미영은 대신 선풍기를 샀다. 홈쇼핑에서 산 38만 원짜리 선풍기로 미영은 정숙을 향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지우려 했다. 사실, 미영은 정숙에게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에 두고 온 5살, 6살 난 아이들이 눈에 밟혔으며, 오늘따라 늦는다는 남편에게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숙과 미리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번에도 아이들 핑계로 미뤘을지도 모른다.
미영의 방문 소식에 정숙은 오전 내내 바빴다. 텃밭에서 캔 봄나물을 무치고, 미영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였다. 반상에 빼곡하게 채워지는 그릇을 보면서도 정숙은 계속해서 요리를 했다. 정숙은 사실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온다는 미영의 말투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이전에도 몇 차례 미영은 온다고 연락을 줬지만 오지 않았다. 그럴 때면 정숙은 빼곡하게 차려놓은 밥상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30년을 내 품 안에서 키웠건만...’ 정숙은 그 동안의 세월이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도 이번엔 미영이 출발한 뒤에 연락했으니,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대문을 기웃거렸다.
미영이 대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정숙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나 왔어.” 하는 미영의 말소리에 마치 그녀가 올 거라는 걸 잊고 있었다는 듯 방을 나섰다. 정숙의 눈에 선풍기 상자를 들고 멋쩍게 웃고 있는 미영이 보였다. 미영의 깊게 내려온 다크서클이, 손목에 있는 손목보호대가 눈에 띄었다. 미영의 눈에 띈 건 이전에 보지 못했던 인형이었다. 어디 지역행사에서 받았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건만... “효돌아, 오늘 날씨는 어떠냐?”며 자연스레 말을 건네는 정숙의 모습에 소리를 질렀다. 놀람도 잠시, 미영은 그 작은 인형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2개월 전, 지자체에서 나눠 준 보육로봇이라 했다. 대충 검색을 해보니, 혼자 살고 있는 노인에게 나눠줘 위험 상황을 보고 받는 로봇인 듯 했다.
“위험? 그것은 나야 모르겠고, 이 작은 것이 말도 해. 신기하기도 허지.” 정숙은 미영의 앞에서 이것저것을 물으며 보여줬다. 내일 날씨를 알려주고, 트로트를 틀어주고 하는 로봇을 보며 미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로봇과 대화하는 정숙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숙이 잠시 밥상을 차리러 간 사이, 미영은 가만히 로봇을 바라보다 문득 궁금해져 질문을 건넸다. 정숙이 지금까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무엇이냐고. 로봇의 대답에 미영은 입을 막고 조용한 눈물을 흘렸다. 미영은 애꿎은 선풍기 상자를 노려보았다.
“한정숙(73세)님이 가장 많이 한 말입니다. ‘효돌아, 미영이는 잘 있으려나? 언제쯤 올까나.’와 유사한 말이 가장 많습니다. 하지만 분석을 시작한 지난 2개월간 한정숙님과 ‘미영’의 일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