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밤공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괜찮아? 너 걱정돼서..”
“응 괜찮아.”
나는 기분이 아주 이상했지만 괜찮다고 답했다.
“내가 너한테 실수한 것 같아. 어제 정말 많이 취했었나 봐. 미안해.”
나는 미안해하는 그에게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그에게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가 나에게 실수했다고 사과를 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나와의 관계가 부담스러워 도망가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를 좋아하는 마음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우리 조금 차분해지면 그때 다시 보자.”
그의 마지막 메시지에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꿈같았던 하룻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나에게 또다시 고통의 시간이 찾아왔다. 연락하지 않는 동안 나는 너무나도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온종일 휴대전화를 들었다 놨다 반복했지만 차마 연락할 수 없었다. 내 손을 기둥에라도 묶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고 싶어서 병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 지우”라고 불러주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듯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감정이었던가.. 나는 마치 하룻밤 그와 보냈던 시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몇 년 전 써놓은 일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비포 썬라이즈”라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단 하루의 사랑을 꿈꿨었다. 그들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들의 행선지가 아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내려서 하루 동안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단 하루의 시간이지만 뜨겁게 마음을 주고받았고, 밤을 같이 보낸 그들은 다음날 헤어지면서 그 기차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게 된다.
“운명적인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하룻밤의 사랑.”
그것은 나에게 로망이었다. 하루만이라도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더는 바랄 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까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나였기에 그들처럼 서로에게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일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나는 이미 충분히 로망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와 서로 사랑을 확인했고,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뜨거운 밤을 함께 했다. 나는 단 하루만 사랑할 수 있다면 더는 바라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했던 부분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사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랑은 어쩌면 순간적인 감정일 수도 있는데, 오랫동안 나만 바라봐준 남자친구를 저버리고 그에게 간다면 나는 정말 못된 년이 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이내 눈물이 흘렀다. 밤새 그의 생각에 뒤척거렸다. 이제 정말 끝인 것만 같았다.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싫어져서 나의 마음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2주쯤 지난 어느 날 그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내? 부산 출장 왔는데 너 생각나서.. 우리 같이 부산 가기로 했었잖아.”
나는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그가 보낸 카톡에 답을 했다. 그저 그에게 온 카톡만 봐도 심장이 마구 뛰어댔다. 그에게 온 연락에 말라비틀어져 가던 내 심장에 단비가 내린 듯했다.
“나야 잘 지내지.”
사실과는 다른 대답이었지만 네가 보고 싶어서 견디기 힘들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넌 2주 동안이나 연락도 한번 안 하고...”
그는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 말했다.
“네가 차분해질 때까지 연락하지 말자며???”
나도 앙칼지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렇지... 난 네가 나랑 자고 나서 마음이 변한 줄 알았어.”
“내가 다음 날 보낸 카톡에도 성의 없게 답하고, 한참 동안 연락도 없어서 난 그런 줄 알았지.”
그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쏟아냈다. 이미 그는 나에게 마음이 떴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오해한 채 각자 힘들어하며 2주를 보냈던 것이다. 그가 힘들어하며 보냈다는 말을 듣자, 그도 나처럼 그날의 일을 소중한 기억으로 담아두고 있었던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2주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는 나의 마음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남자친구보다 그를 더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음 절절하게 그리운 건 남자친구가 아니라 바로 그였다.
그리고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 만나. 할 얘기가 있어.”
그는 부리나케 뛰어나온 듯 정신없는 표정이었다. 커피숍에 마주 앉아 막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나는 손을 슬그머니 빼면서 말을 꺼냈다.
“나 생각해 봤는데,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갑자기 남자친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 보고는
”괜찮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줘. “
”아니 내가 안 괜찮아. 오빠 만날 때마다 죄책감 느껴진단 말이야. “
나는 얼굴을 떨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현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때까지 우리 잘 지내 왔잖아.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뭐 잘 못 한 거라도 있어? 내가 다 고칠게.. 이러지 마. “
”미안해…. “
나는 울고 있는 그를 뒤로한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