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밤공기>
그날 저녁 그는 지인분들과 서울역에서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 모임 후에 시간이 된다면 다시 우리 집 근처로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시간이 된다면...”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현실 가능성은 사실 매우 희박했다. 나는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기대하며 그와 밤에도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쯤 나는 그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말이 넘쳐나서 입 밖으로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수줍어하며 말을 꺼냈다.
“낮에 너 만났을 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못했어.”
“그래? 무슨 말인데? 그럼 지금 말해죠.”
그는 무슨 말인지 궁금한 듯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 얘기했다.
“음............”
“정원아…. 너 오늘 엄청나게 멋있었다. 잘 생겼어. “
순간 쑥스러움이 밀려오면서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웃으며
“우리 지우도 너무 예뻤어요. 사랑해. “
라고 말해주었다. 특별한 말도 아닌데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으니 예쁘다는 말이 마치 반짝 빛나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화를 끊은 후 한껏 들뜬 마음으로 나는 그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그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오늘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나 먼저 빠져나갈 분위기가 아니네. “
역시나 오늘은 다시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시긴에 되면..이라는 말에 희박한 확률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잔뜩 기대했던 마음이 사그라들면서 실망감이 컸지만 나는 쿨하게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차에 올라타 음악을 들으며 드라이브를 했다. 나도 모르게 서울역 근처로 차를 몰고 있었다. 약속 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근처로 가면 그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쉬움이 달래질 것만 같았다.
한남대교를 건너고 있을 무렵 그에게 또다시 전화가 왔다. 아까 그와 통화하는 것을 옆에분이 듣고는 나도 그 모임에 합류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함께 있던 다른 분들도 나를 보고 싶어 한다며..
“너도 여기로 올래? 여기 계신 분들 다 좋으셔.”
낯선 사람들과 낯선 장소는 내가 제일 불편해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도 내가 당연히 그 자리에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한번 얘기해 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흔쾌히 가겠다고 말해버렸다.
“정말 올 거야?”라고 말하며 그는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청바지에 검은색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블로퍼를 신은 채 그곳으로 향했다. 너무 편한 복장이라 살짝 후회되긴 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그곳에 단지 그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나는 이미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었던 터라 가르쳐준 장소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호기롭게 그곳으로 향했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남자 5명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해 있었다. 그는 내가 그곳에 진짜 온 것이 당황스러웠는지 아무 말 못 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옆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도 그의 지인분들이 친절하게 나를 반겨주셔서 어색함은 금세 사라졌다. 우리는 맥주잔을 높이 들고 건배하면서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위기는 아주 호의적이었고 내가 겁도 없이 그 자리에 온 걸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부티 나고 예쁘시네요.”
내 맞은편에 앉아 계시던 동그란 얼굴형에 안경을 끼고 머리카락이 조금 곱실거리는 분이 말했다.
“저요? 누워있다가 대충 입고 나온 건데..”
나는 당황하긴 했지만 예쁘다는 말에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후 그중에 제일 연장자인 분께서 갑자기 그를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우리 정원 씨는 너무 착하고 의리 있어요. 특히나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 꼭 임원 달 거예요.”
그러자 또 옆에 있던 호남형에 안경을 끼시고 마치 교수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분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 우리가 알고 지낸 지 5년이나 됐는데 늘 한결같아. 올해 초에는 제주도도 같이 다녀왔었지 않아요. 여행 같이 가면 사람 본모습 다 나오거든요.”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10시까지 술을 마시고 그분들과는 헤어졌다.
“이제 둘이 시간 보내게 우리는 빠져줘야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제일 연장자이신 분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대리를 불러서 호텔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대리기사를 기다리면서 그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눈치 없이 껴서 좀 불편했지?.”
그가 별말이 없이 어색해하는 것 같아서 내심 걱정이 되었다.
“아니 아주 좋았어. 네가 분위기를 잘 맞춰줘서 다들 좋아하셨잖아. 불편했을 자리였을 텐데 오히려 고마웠어.”
그의 예상 밖의 대답에 안심이 되었다. 그들만의 모임에 불청객이 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는 피곤했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내 무릎 위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잠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려다보니 어린아이 같아 사랑스러웠다.
근처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는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는 듯했다.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방문 앞에서 카드키를 대고 문이 열리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렬하게 키스를 했고 서로를 탐했다. 서로의 옷을 벗기고 몸을 더듬어 만지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침대에서 잠깐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나에게 들어왔을 때 나의 몸이 비비 꼬이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 온몸이 그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우리는 몇 번이나 계속해서 그 시간을 즐겼다. 전희와 후희가 없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하는 그 시간이 마냥 좋았다.
그는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확인받고 싶은듯 이렇게 물었다.
“좋았어?”
“응”
나는 너무 좋아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지만 수줍은듯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잡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우리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먼저 잠에서 깨어난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꼭 감은 눈, 오똑한 콧날, 살짝 벌어진 입술이 멋있게 빚어진 조각처럼 느껴졌다.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행복감이 밀려왔다.
잠에 서 깬 그는 서둘러 집으로 가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대리를 부르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마음이 마구마구 벅차올랐다. 오늘 하루가 선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