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밤공기>
예전에 나는 그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었다. 그것도 12년 동안이나... 그런데 어쩌다가 그가 내 마음 가득 차지하게 되었을까? 문득 과거의 우리 사이가 떠올랐다.
2020년 어느 날 나는 그에게 10년 만에 전화를 걸었다. 010-0000-1234 신호가 몇 번 울리더니 어떤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정원이 전화 맞나요?”
“네 맞는데 누구세요?”
“나.... 지우야..”
“뭐 한지우??? 오 정말 반갑다.. 근데 진짜야?”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혜진이언니한테 물어봤어.
“근데 무슨 일로 연락했어?“
“그게 말이야 네가 군대 있을 때 나한테 편지 보냈던 거 기억나? 그 편지가 아직 남아 있었더라고.. 그래서 네가 생각났어. “
나는 머뭇거리며 전화한 이유를 변명하듯 말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간에 너한테 연락 와서 아주 반갑다. 언제 커피라도 한잔 마시자.”
그렇게 우리는 10년 만에 다시 연락이 이어졌다. 그는 너무 궁금하다며 빨리 보자고 재촉했고, 어느 금요일 저녁 그랜드 하얏트 호텔 라운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를 만나는 것이 그다지 기대되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그저 옛 친구를 만나는 약간의 들뜸이 있는 정도였다.
나는 조금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로비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하얏트 호텔임을 알리는 향기가 한가득 퍼져있었다. 우디 계열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향기.. 나는 그 향기가 아주 좋았다. 금요일 저녁이라 호텔 로비는 제법 붐비고 있었다.
라운지에도 비어있는 자리가 거의 없어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라운지 무대에서는 흑인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때마침 내가 아는 곡이 흘러나왔다. Westlife의 My Love 4명의 가수가 화음을 맞춰서 부르는데 그 목소리가 감미롭게 들려왔다.
그는 출장 다녀오는 길인데 조금 늦는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출입구 쪽을 바라보며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해 보았다. 서로 못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스쳐 지나갔다.
한참만에 한 남자가 전화하면서 걸어 들어왔다. 긴 트렌치코트를 입은 날씬한 남자였다. 내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정원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너 어떻게 하나도 안 늙었냐. 똑같네.”
“아... 고마워.. 그래도 늙었지 뭐.”
“너 길에 그냥 지나가면 못 알아보겠는데, 회사원 다 됐네.”
그는 대학교 때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우리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었지만, 음악 소리가 제법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를 만나게 되어서 너무 떨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끝내고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다. 그는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바로 인사하고 돌아섰다.
나중에서야 안 얘기였지만 그는 그날의 나에 대한 인상이 상당히 깊었다고 했다. 호텔의 분위기도 환상적이었고 나의 모습도 많이 변하지 않아 너무 예뻐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대학교 때 같이 놀던 친구 중에 한 명일 뿐이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신입생 환영파티 때였다. 잔뜩 술에 취한 남자 동기들이 갑자기 경쟁이라도 하듯이 한 명씩 밖으로 불러내어 사귀자며 대시를 했다. 나는 처음에 현준이라는 키 큰 남자친구가 불러서 나갔지만, 썩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갑자기 정원이가 나를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현준이랑 사귀지 말고 자기랑 사귀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정원이를 처음 보았다. 정원이는 아직 풋내 나는 어린애 같아 맘에 들지 않았다.
정원이의 대시를 거절하고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는데 정원이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안 건 바로 그때였다.
“정원이 여자친구 있어.”
선배언니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미친놈”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원이는 다음날 술이 많이 취해서 실수했다며 나에게 사과를 했지만 나는 여전히 이상한 애라 생각하며 무시해 버렸다. 나는 그 무렵 동기 남자애들에게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고 뭔가 미성숙해 보이는 것이 이성적인 끌림은 전혀 없었다. 2.3학년 선배 오빠들이 더 멋있어 보였고, 술을 사주는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함께 즐겁게 지냈었다.
정원이와 다시 친해지게 된 건 4학년이 되어서이다. 대부분의 동기 남자애들은 군대에 가 있었고 여자친구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휴학해서 동기 중에 나랑 정원 이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막상 지내다 보니 이상한 아이는 아니었다. 착하고 예의 있고 같이 있으면 편안했다.
남녀가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사귄다는 오해도 있었지만 우리는 크게 개의치 않고 함께 다녔다. 그리고는 그가 군대에 가게 된 이후로 연락이 끊겨버렸다. 중간마다 종종 소식은 들었지만 크게 관심은 두지 않았다.
그런 그를 10년 만에 만났을 때도 분명 반가웠지만 내 마음은 그다지 동요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종종 연락이 왔지만, 나중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시점에 갑작스럽게 그에게 사랑에 빠진 건 어떻게 보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33살이 될 때까지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때까지 남자친구를 사귈 때는 나를 많이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왔었다. 이렇게 마음이 서로를 행하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나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