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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뚜막 고양이 Jan 20. 2023

9. 매일 그대와

< 4월의 밤공기>

며칠 후 그의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 추억여행을 하고 오겠노라며 그는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향했다. 그에게 어머니를 추억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기에 만나자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뒷날 들은 소식에 의하면 어머니 기일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었다고 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몇 년 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그날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어제는 어머니의 기일을 오늘은 외할머니의 장례식을 간다니 허망한 노릇이었다. 그는 어제 새벽까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며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외할머니 장례식장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야 했으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장례식에 다녀오는 그를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다. 사실 이번주에도 봤지만,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의 사랑은 이기적이다. 정말 피곤한 그를 집으로 보내지 않고 나랑 있어달라고 졸라댔다. 직접 운전해서 다녀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좀 망설였지만 결국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행복하다.. 행복하다.. 미칠 듯이 행복하다. 내 심장은 이미 나의 몸을 뚫고 나가 하늘 위로 둥둥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양재천 근처에 있는 “고스”라는 카페에서 만났다. 브런치 카페였지만 밤에는 술집으로 바뀌는 특이한 곳이었다. 맥주 한잔하고 싶은 분위기였지만 둘 다 차를 가져온 터라 그럴 수가 없었다. 어둑어둑한 조명은 우리 사이를 감추기에 딱 맞았다.

그와 마주 보고 얘기할 수 있어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의 눈은 피곤한 듯 퀭했지만 지친듯한 그의 모습도 왠지 모르게 섹시하게 느껴졌다.

“ 나 진짜 피곤했는데 너 보니까 말짱해졌어. 하나도 안 피곤해.”

나는 그만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렇게 말해주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냥 얼굴만 봐도 좋았다. 아니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아무런 의미 없는 그의 말에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커피를 다 마시고는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양재천을 걷기로 했다. 아직 10월이었지만 물가로 가니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평소 혼자서 양재천을 걸을 때면 그와 함께 걷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손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말이다. 혼자 걸을 때의 나의 눈은 지나가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쳐다보았고 , 높이 솟아있는 빌딩들의 불빛도 바라보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온 신경이 서로 맞잡고 있는 두 손으로 몰려있는 듯했다.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게 좋았다. 빠르게 걷지도 않았는데 나의 심장은 경쾌한 박자로 마구 뛰어댔다.


양재천을 걷다 약간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져서 아까 만났던 커피숍 근처 골목으로 돌아갔다. 산책이 끝나고 서로 헤어지기로 했지만 우리는 말도 없이 계속해서 골목길을 걸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걷고 싶었다. 이대로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목골목마다 예쁜 카페와 분위기 좋은 와인바 그리고 이자카야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다음에 만날 장소를 함께 골라보았다.

“우리 다음 주에는 여기서 만나자.”

아늑한 분위기의 이자카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하고 차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누르며 우리는 각자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내 심장은 멈출지 모르고 쿵쾅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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