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너무 비싼데? 정신차리고보니 결제완료.
'엄마 음식은 맛이 없어'
입이 짧은줄만 알았던 첫째와 둘째.
첫째가 외식을 할 때 밥 한공기는 그냥 뚝딱, 심지어 배고프다며 한공기 더 달라는 것을 보고 입이 짧아서가 아니라 내가 한 음식이 맛이 없어서 안먹는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는 '엄마 음식이 최고야!'라 말하지만 두어숟갈 뜨고 딴짓을 하고, 할머니 집에서는 주는대로 입을 쩍쩍 벌리며 잘 먹는 것을 보고 그 말은 엄마듣기 좋으라고 한 립서비스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집에서 때되면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남편은 나보고 배고프지 않냐고 신기해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잔에 쿠키하나면 충분하고 밥때가 되어도 특별히 뭘 먹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먹기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위해 먹는.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알약이 하루빨리 개발되기를 바랄정도. 이만큼 음식에 관심이 없고, 만드는 것에는 더더욱 취미가 없었다.
신혼때에는 요리책 한 권을 사서 미션수행하듯 음식을 만들었다. 아이들 이유식도 마찬가지. (엄마가 만든 것보다 시판용 이유식을 더 잘 먹기는 했다.) 한 날은 고추장찌개를 만들었는데 소 뒷걸음치다 쥐잡는 격으로 맛있게 만들어진 것! 남편이 양 손으로 엄지척을 하며 바닥이 보이도록 박박 긁어먹었는데, 왜 똑같은 레시피로 똑같은 사람이 만드는데 똑같은 맛은 안나는지... 그날 이후로 그 고추장찌개는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음식을 잘 만드는 것에는 재능이 없지만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욕심은 점점 커져갔다. 요리를 잘한다는 사람들의 SNS를 팔로워하며 내가 따라할만한 것이 무엇인지, 그분들의 비법이 무엇인지 살펴보다가 신기한 냄비(?)하나를 발견했다.
영상을 보니 이것저것 재료를 넣어서 온도와 시간을 맞추고 뚜껑을 닫았다가 열었는데 윤기가 좌르르-흐르는 떡볶이가 완성이 된 것! 편집했다는 말이 안나오게 처음부터 끝까지 타임랩스로 찍힌 영상이었다. 다른 게시물도 보니 그 냄비로 카레도 만들고, 미역국도 만들고, 육수도 만드는데 하나같이 다 먹음직스러워보였다. 고수는 장비탓을 안한다지만 초보는 장비빨이 필요하니까. 이 냄비만 있으면 어떤 음식이든지 깊이있는 맛을 낼 수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냄비를 검색해봤다. 그리고 가격을 보고 솔직히 놀랐다.
저 돈이면...백화점에서 눈여겨봤던 마네킹이 입고있는 가볍고 따뜻한 코트를 살 수 있을텐데.
저 돈이면...얼마전에 산 바지에 어울리는 앵클부츠를 (백화점에서)살 수 있을텐데, 그걸 사고도 돈이 남아서 화장품 하나 더 살 수 있을텐데!
우리집 한 달 식비의 반정도의 금액인 냄비를 보니 일단 사고싶다는 생각, 아니 살 수 있다는 생각이 팍 식어버렸다.
그런데 그 냄비가 계속 보인다! 그걸로 뚝딱뚝딱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니 저 냄비만 있다면 나도 집밥을 맛있게 만들 수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싸지만 잘 활용해서 집밥을 해먹는다면, 그것도 맛있는 집밥을 해먹일 수 있다면 외식하는 비용이나 비싼 냄비비용이나 거기서 거기일거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매번 아이들과 나가서 먹으려면 먹을 것이 한정되어있는데 이 냄비로 그럴듯한 집밥을 해먹인다면 외출하지 않고도 집에서 맛있는 한끼를 해결할 수 있을텐데.
아이들이 신선한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진 집밥을 먹으면 건강해질텐데.
그래, 건강이 최고지.
뭐니뭐니해도 집밥이지!
'이 냄비는 한 번 구입하면 평생을 쓰겠지?! 한 번 구입하면 언젠가는 낡아버리는 코트나 신발보다 나을거야.'
'잠깐, 압력밥솥이 얼마지?! 이거랑 비슷하잖아! 오히려 더 비싸잖아! 압력밥솥 살 때는 별 고민을 안했었는데..이 냄비는 이렇게 고민한다는건가?'
'그러고보니 예쁘다고 사고싶었던 전기레인지보다 이게 조금 더 저렴하네.'
더이상 그 냄비는 내게 비싼 냄비가 아니게되었다. 비싸지만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 여기며 가격의 합당성을 찾고 있었다.
이제 판매자의 요리시연영상이 남일처럼 보이지 않는다.(그렇다. 내가 본 영상은 판매를 위한 영상이었던것! 마케팅 성공하셨어요..!)
이미 나는 그 냄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해먹을 생각을 하고 있다.
판매가 시작되는 시간. 수량이 없어서 오픈런을 해야 구입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두근거린다. 시간을 맞춰서 들어가 겨우 구입을 했다. 내가 구입한 냄비는 오픈한지 2분만에 전수량이 나갔다고 한다. 나만 이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면서 이 냄비를 구입한 것에 대한 정당성이 생겼다.
배송을 받았다. 받자마자 해먹을 음식 재료를 미리 사놨기 때문에 새 냄비 세척을 한 뒤에 바로 조리를 시작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정도로 재료가 푹-익다니! 이런 맛이 나다니...! 역시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육수를 만들어보고 같은재료로 만들었는데 더 진한 색의 국물이 생긴 것을 보고 왜 이제서야 샀을까, 이제라도 사서 다행이다 싶었다.
남편은 이게 일반냄비와 비슷한게 뭐냐고 물어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나도모르게 판매자처럼 이 냄비의 특징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이걸로 맛있는 밥을 만들어 준다면 남편도 이 냄비의 진가를 아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끝까지 가격은 말하지 않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