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발언을 후회합니다.
어차피 어질러질 것, 꼭 청소를 해야 해?
넌 그럼 어차피 일어날 거 잠은 왜 자니?
결혼 전, 부끄럽지만 학교 다닐 때 친정엄마와 싸웠던 수많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고백하자면 오랫동안 살림과 집안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엄마나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기만 했고 어질러져 있는 방도 나름의 규칙이 있는 거라 정신승리를 하며 손을 대지 않았었죠. 가끔 책상 위에 쌓인 먼지를 닦는 정도가 제가 하는 청소의 전부였습니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친정엄마가 결혼하면 질리게 할 건데 미리 신경 쓸게 뭐 있냐며,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 하셨죠. 물론 지금 친정엄마는 그 발언을 하셨던 것을 후회하십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했냐고요? 노코멘트...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밥상에 밥이 차려져 있었고,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지 않았습니다. 안녕히 다녀오겠습니다-다녀왔습니다 인사만 하고 집을 왔다 갔다 하며 깔끔하게 정돈된 집을 마주할 때에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크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엄마나 할머니의 노력이 담겨 있다는 것을요.
이불 정리하는 건 싫어했지만 정돈되어있는 침구에 들어가 누워있는 것은 좋아했습니다.
청소기를 들어 청소를 하지 않았지만 발바닥에 먼지나 머리카락이 붙는 건 싫어했어요.
정리는 하지 않았지만 필요한 물건을 찾았을 때 한 번에 찾지 못하면 답답했습니다.
책임을 다하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누릴 수 있고, 싫어하는 것은 최대한 경험하지 않았던 것.
모두 엄마와 할머니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을 주부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어요. 그때의 엄마와 할머니가 했던 역할을 해야 하는 위치가 된 지금, 누리기만 했던 시절에 대한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마음가짐은 아니었어요. 주부였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관성이 남아있어서인지 내심 집을 가꾸는 것을 누가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어차피 더러워질 것', '어차피 다시 개수대로 올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억지로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찌 됐든 내 본업은 주부고 내 할 일을 잘 해내겠다는 다짐으로 집을 돌보고 가꾸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가짐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물론 '어차피~' 하는 생각이 100%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엄마, 집이 깨끗해서 정말 좋아요!
어느 날, 하원하고 집에 온 첫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했던 말이에요. 아이가 방방 뛰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모습을 보려고 청소를 했구나' 싶더라고요. 손을 씻고 간식을 먹은 다음에 아무것도 없는 거실 바닥에 아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펼쳐놓고 철퍼덕 앉아 깔깔거리며 놀다 보니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고 이렇게 청소를 했구나' 싶었어요.
큰맘 먹고 냉장고 정리를 한 뒤 청소를 한 날, 마트에서 사 온 식재료들을 차곡차곡 어렵지 않게 넣고 쉽게 찾아 꺼낼 수 있으니 편하더라고요. 아무것도 올려져있지 않은 주방 상판 위에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식재료를 올려두고 곧바로 재료 손질을 한 뒤 먹을 것을 만들 수 있으니 집밥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집안 전체를 환기시키고 청소한 후 느껴지는 상쾌함, 찾는 물건을 바로바로 찾을 수 있는 것. 살림의 모든 과정이 아직 손에 완전히 익숙해지진 않았지만 살림에 신경을 썼을 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좋아서 움직이게 되네요.
어차피 되돌아갈 것이지만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재미를 찾고 뿌듯함을 찾아서 잘 해내 보자.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림을 대하니 조금은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리고 정말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겹고 힘들게 느껴질 때에는 그 시절의 엄마와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그때 엄마와 할머니도 이런 과정을 견디셨겠지.. 이제 내 차례다.'하고 말이죠. 반성하는 마음 조금 보태서.
번외 1) 얼마 전에 친정엄마가 저희 집에 오시더니 '이제 네가 나보다 살림살이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아~! 나무주걱 이건 어떻게 관리해야 하니?' 하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에게 인정받는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번외 2) 그리고 전 제 딸과 아들에게 집안일을 하는 방법을 조금씩 알려주려 합니다! 살림의 재미도 함께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