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을 읽고
고전 중의 고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에리히 프롬이라 하믄, 고등학교 입학 도서의 '소유나 존재냐'라는 도서로 더욱 익숙한 저자. 그 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는 글자들을 눈에 집어 넣으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선뜻 독서를 시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책이다.
첫 만남은 2020년도였을 것이다. 평소에 읽고 싶은 책이었지만, 표지가 책을 구매하는 데 한 몫 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책은 밑줄을 그으며 읽다 잠시 내려두었던 것이, 2년이라는 시간 후에 다시 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의 에센스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능동적인 행위이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p.42 '2. 사랑의 이론' 중
사랑은 활동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그나 그녀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 있다. 내가 게으르다면, 내가 끊임없는 각성과 주의와 활동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나는 사랑받는 사람과 능동적으로 관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 사랑의 능력은 긴장, 각성, 고양된 생명력의 상태를 요구한다. 이러한 상태는 여러 가지 다른 생활 분야에서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을 취할 때만 생길 수 있다. 다른 분야에서 비생산적이라면, 우리는 사랑에서도 생산적일 수 없다.
p.182~183 '4. 사랑의 실천' 중
예전에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의 유형 중 '감상적 사랑'을 꽤 오랜 시간 해왔다고 생각됐는데, 감상적 사랑이란 '사랑은 환상 속에서만 경험될 뿐, 실재하는 다른 사람과 여기서 지금 맺고 있는 관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러한 사랑의 본질이 있다.'에 해당하는 유형이다. 현실 속에서 관계 맺기에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관계의 이상형이 있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행동하는 느낌. 그래서 더 극적인 감정을 느끼길 바랐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 같은, 이 사람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감정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극적인 감정을 내가 '느끼느냐' 보다, 어떤 다짐을 '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이 사람을 위해 내가 어디까지, 어떤 것을 줄 수 있을까?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가? 노력할 수 있는가? 이 사람이 주는 애정을 생각하기보다 내가 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에 먼저 행동할 수 있는가? 이런 점 때문에 이제는 시작부터 어려워졌구나, 싶었으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해나가고 있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늘 사랑은 바쁠 때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니라, 뭔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게 상대 때문인 것인지, 나의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정말 상황적으로 일이 바쁜 것인지 항상 궁금했고, 때로는 힘들었다. 하지만 사랑의 능력이 생명력의 상태를 요구한다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다른 일에서도 능률이 오르는 것이 이 때문이었구나.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고 충만한 감정을 느꼈을 때 힘이 드는 게 아니라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게 이 때문이었구나.
2.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고, 이를 위해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또 이를 위해서는 겸손한 태도를 갖자.
... 내가 앞에서 말한 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는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사랑의 기술이 실용이라는 관점에서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곧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는 이방인에게 객관적일 수 없는 한, 나의 가족에 대해서도 참으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역도진이다.
p.169~172 '4. 사랑의 실천' 중
3. 합리적인 신앙을 기르려면
...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이다.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신앙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퍼스낼리티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성격상의 특징이다.
p.173 '4. 사랑의 실천' 중
...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미래에도 오늘과 같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지금 기대하는 바와 같이 느끼고 행동할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p.176 '4. 사랑의 실천' 중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생활의 일차적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격리와 소유를 자신의 안전책으로 삼는 방어 기구에 칩거하는 자는 누구든 자기 자신을 죄수로 만들게 된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는-그리고 이러한 가치로 도약하고 이러한 가치에 모든 것을 거는-용기가 필요하다.
p.179 '4. 사랑의 실천' 중
신앙과 용기의 훈련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첫 단계는 어디서 언제 신앙을 상실하는가에 주목하고, 신앙의 상실을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합리화를 가나하고, 어디서 우리가 비겁한 태도로 행동하는가, 또한 어떻게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배반하는 경우 언제나 약해지며, 우리가 약해지면 점점 더 새로운 배반을 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또한 '사랑바지 못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도, 비록 대체로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따라서 신앙을 거의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한다.
p.180~181 '4. 사랑의 실천'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 안주하지 않으려는 용기.
합리적 신앙을 가질 수 있기 위해 능동적인 행위들을 더욱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기록을 남겨두는 것도 그의 일환.
다양한 사랑의 종류, 현대인들의 자동 기계화에 따른 현상 등과 함께 사랑에 필요한 자세를 알려주는 책이었다. 다시 보게 되니 와닿는 부분들이 이전에 비해 확연히 늘어난 것이 신기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틀린 것이 아니었구나,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사랑을 '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기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앞으로 두고두고 꺼내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