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틔운 온기로

프롤로그 | 부엌에서

by 데이지

어딜 가도 도비가 있다. 냉장고를 열어도 도비가 있고 서랍을 뒤적거려도 도비가 있다. 14년 동안 같이 부대끼던 나의 도비가 강아지별로 돌아간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집안 곳곳에서 숨 쉬고 있다.






도비가 떠나고 2-3일 동안은 소파에 누워서 계속 울기만 했다. 이미 몇 주 전부터 동물병원을 통원하면서 지칠 대로 지쳐있던지라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프리랜서이긴 하지만 약속된 날짜에 해야 할 일들은 남아 있기에 억지로 몸을 쥐어 짜내면서 일을 마무리 지었고 그 외 시간은 휴대폰만 붙들고 나에게 남겨진 사진과 영상만 봤다.






'부엌에서' 사진첩을 뒤적거리다 멈칫했다. 나는 보통 주방이라고 하기 때문에 부엌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랜만이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이폰이 편집해 놓은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부엌에서의 나는 참 행복해 보였다.






지금 내 부엌은 인테리어 비용을 아끼기 위한 셀프 인테리어의 결과물이다. 기존에 있던 부엌은 너무 협소해 요리할 맛이 나지 않아서 방 하나를 주방으로 쓰기로 하고 시공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데 5년이 지난 지금에서 보니 촌스럽다. 그 사이 취향도 많이 변하기도 했고 늙기도 하고 도비가 없기도 하고... 조만간 이 공간을 다시 뜯어고칠지도 모르겠다.






아이폰 부엌 사진 모음








부엌 사진들을 본 후에야 드디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달간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밥만 해 먹었다. 사진은 거의 찍지 않았다.

찍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못했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요리하는 동안은 도비의 마지막 순간이 그나마 덜 떠올라서 숨통이 트였다.






우체국 가야 할 일이 있어서 한 달여 만에 밖으로 나왔다. 바깥도 온통 도비였다. 언제쯤 무뎌질 수 있을까. 그러다 집 앞 시멘트 위에 민들레가 피어난 걸 보고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았다. '기어이 너는 꽃을 피우는구나'






펫로스 상실감을 채워주는데 제일 효과가 좋았던 건 사진 인화다. 휴대폰에서만 들여보는 거랑 인화해서 집안 곳곳에 놓는 거랑 확실히 다르다. 대형인화는 엄마집에 부착했는데 도비가 살아 있는 거 같아서 사진 보며 말도 걸어보고 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조금씩 내 생활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주옥같은 축구를 하고 있는 맨유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입에서 된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욕을 하게 만드는 너네는 참 재주도 좋다.






처음으로 빵을 구웠다. 내 부엌에는 토스터기 오븐이 전부고 식힘망이고 뭐고 제대로 갖춰진 도구도 하나 없었는데 그냥 무작정 시작했다. 블랙올리브 치아바타. 수율이 높아서 초보자인 나에겐 성형하기 너무 힘들었고 토스터기도 최대온도가 200도까지밖에 안 올라서 큰 기대는 안 했는데 맛이 나쁘지 않았다. 폴앤폴리나 빵을 좋아하는데 신기하게 얼추 그 맛이 나더라. 조금 더 연습해서 기공 예쁜 단면을 가진 치아바타를 굽고 싶다.






프랑스 밀가루로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새벽배송 되는 애는 카푸토 밀가루뿐이라서 선택의 여지없이 주문했는데 아주 괜찮았다. 내친김에 피자 도우도 만들어 보려고 피자전용 밀가루도 하나 더 주문했다.






바로 구워서 엄마도 갖다 줬는데 먹을만하다고 계속 구워보라고 했다. 내가 빵을 굽고 나서 발사믹오일도 주문한걸 보니 꽤나 만족스러웠나 보다. 뿌듯해라.






요리와 마찬가지로 베이킹하니깐 잡생각이 안 나서 좋다. 이 정도면 오븐 살 이유 충분하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부엌에서의 분주함이라는 걸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 데이지의 서울살이

반쪽 1인 가구 조각 일상 모음집

시간의 순서가 아닌 의식의 흐름대로 기록합니다.


데이지

사진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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