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아카바에서 만난 슬러시 상인
그거 알아?
현대인보다 중세인이 행복감을 더 느낀다고 해.
몇 분 만에 메일을 작성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우리보다
며칠이 걸려 전달되는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는 거지.
참 이상해,
오늘날 기술의 발달로
우린 과거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더 많은 일들을 하게 되었잖아.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얻게 된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린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할까?
더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해도
더 많은 기회가 없어도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도
과거 사람들이 더 행복해하는 이유는 뭘까?
언제나 시간이 부족해
초 단위로 살아온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여행을 통해 깨닫는다.
서두를 필요 하나 없다는 것을,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것을,
여행을 내게 속삭인다.
여행을 통해
여유가 주는 행복을 느낀다.
머무름이 주는 교훈을 얻는다.
그런 여행을 통해,
나는 삶을 배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흡연율을 자랑하는 요르단*
그 위엄처럼 요르단에 입국하자마자 담배 냄새가 풍긴다.
붉은 체크무늬의 키파야(Keffiyeh)를 입은 세관원은
국경 검문소에서부터 담배 피우며 여권에 도장을 찍는다.
세관원의 타오르는 담배 끝,
벽에 걸린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의 커다란 사진,
짙은 눈썹의 세관원이 돌려주는 여권 뒤로
아라비아 나이트에 나올법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스라엘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는
내가 다시 중동 국가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실감 나게 한다.
*해당 문구는 현지 친구의 말에 의해 작성된 문구이며, 통계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유물은 힘을 가진다.
수천 년이 지난 시간을 간직하는 힘을 가진다.
당시 시대를 오로지 간직한 채
오랜 세월을 품어 온 유적지를 거닐며
과거 시간을 느낀다.
사각사각 밟히는 모래 소리를 배경으로
삶의 풍화를 견뎌온 돌을 바라본다.
돌의 거친 촉감을 느끼며
고대로 회귀하는 시간을 느낀다.
살던 적 없는 삶을 생각하고
탄생 이전의 시대를 상상하는 건 신기한 일이다.
모양 잡힌 돌덩이를 보며
고대를 느끼고 음미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유물 그 존재 자체가 가져다주는 마법 같은 힘을 느낀다.
견고한 돌이 가진 능력,
상상하는 인간이 가진 힘,
그 둘을 음미할 수 있는
이 시간이 가진 행운이다.
성채 동굴 안,
좁은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솔 솔 솔
솔솔 부는 바람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유일한 틈은 빛이 되어 성채 안 시선을 잡는다.
틈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상상하게 하고
꿈꾸게 하며
희망을 품게 한다.
아카바 성에서 나와 바닷가로 넘어온다.
입수할 생각이 없던 나는 산책길을 따라 쭉 걷는데,
뜨거운 햇살 아래 반짝이는 윤슬로
바다는 들어오라고 속삭인다.
나는 그런 아카바 바다 꾀에 넘어간다.
"혹시, 물안경이 있으세요?"
바다에 몸을 담그니
바닷속이 보고 싶어 진다.
물 밖으로 나와한 가족에게 물으니
어린아이용 분홍 물안경만 있다고 답한다.
"그래도, 쓰고 싶으면 써"
여러 차례 다른 이에 물안경을 물어봐서 거절당한 터라
가족의 분홍안경을 챙겨 아카바 바다를 탐험한다.
이스라엘 에일랏과 홍해(아카바만)를 공유하지만
아카바 바다는 에일랏 바다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조금 탁하게 느껴지는 아카바 바다지만
유아용 분홍 물안경으로 유유히
바다를 빌리는 물고기를 구경한다.
한참을 물고기와 인사하다
안전선 위에서 바다를 느끼며 누워있는데
동일한 자세로 안전선 위에 누워있는 누군가가 말은 건다.
"앗살라말라이쿰(안녕하세요)."
아랍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인사 뒤로 이어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하며 안전선을 넘어간다.
나는 그의 손짓을 따라간다.
푸핫
유아용 분홍색 물안경을 끼고
몇 분 전 처음 본 중동 남자를 따라
안전선을 넘어 수영하는 내 모습이란!
문득 든 생각에 홀로 웃으며 그를 따라가니
탁해서 잘 보이지 않던 이전보다
다양한 물고기가 보인다.
가재, 장어 등 이름 모를 여러 물고기는
나를 더 안전선으로부터 멀리 이끈다.
정체 모를 중동 남자를 따라
아카바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고
바닷속 친구들과 인사한다.
따사로움을 넘어 뜨거운 태양 아래
요르단 바다의 시원함을 한참 느끼고 나오니
낯선 이는 자기 회사로 나를 초대한다.
"헐! 슬러시 장사하는 거예요?"
바닷가 가까이 위치한 조그만 건물,
그 건물 앞에 있는 조그만 슬러시 기계는
그의 생계를 책임지는 작지만 큰 존재이다.
본인을 라지라고 소개하며
내게 무료로 딸기 슬러시를 건넨다.
스노클링을 맨발로 하다 보니
바위에 긁힌 부분을 살피는데
라지는 내 발바닥의 흉터를 살펴준다.
발바닥에 중간 크기의 가시가 박혀
라지는 가시를 빼내려고 한다.
달달한 슬러시를 먹으며
가시를 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푸핫.
무료 슬러시를 먹으며
말도 통하지 않는 중동 남자가
내 발바닥 가시를 빼려고 하는 이 상황이란!
처음 만난 낯선 이의 발에
정성 어리게 살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유아용 분홍색 물안경,
시원한 분홍색 슬러시,
작지만, 커다란 호의는
요르단 사람들이 주는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다.
라지의 제안으로 우린 저녁에 다시 만난다.
자전거를 타고 아카바 일대를 함께 달린다.
뜨거웠던 바다의 낮은 온데간데없고
시원한 바람만이 나를 반긴다.
아카바의 밤을 밝히는 무수한 건물 물빛을 지나
밤바다를 향해 빛을 내뿜는 달을 바라본다.
"라지! 기분 최고야!"
그의 조그만 슬러시 기계 앞에 돌아와
소다 맛 슬러시를 마시며 이야기 나눈다.
"라지는 언제 행복해요?"
삶의 이유를 행복이라고 말한 라지는
번역기를 보여주며 웃는다.
"수영할 때 행복해.
훗날, 필리핀에서 수영하고 싶어."
볼록 튀어나오는 배를 숨기지 않은 채
거드름으로 의자에 앉은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슬러시 장사 아저씨의 모습이지만
뜨거웠던 태양 아래
안전선 너머 나를 새로운 바닷세계로 이끈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삶을 살아가는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달달한 슬러시를 먹으며 생각한다.
뭍과 멀리 떨어져 바다 지평선을 향해 수영하던 라지의 모습이
마치 삶을 살아가는 라지의 모습이구나.
슬러시의 소다 맛이 입안에 퍼진다.
시원한 슬러시가 조금씩 녹아
물을 만들며 아카바의 밤이 저문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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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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