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즈크흐슈텐에서 만난 글라라
'희망'
데이지 꽃의 꽃말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예진아,
너는 우리의 희망이야."
내가 들었던 칭찬 중에서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잔향을 내뿜고,
지금까지 내게 힘이 되어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진아,
너는 우리 학교의 희망이야."
"너는 우리 지역의 희망이야."
"예진아, 너는 나의 희망이야."
우연이라면 우연이듯,
나를 무언가의 희망이라고
말해주는 몇 번의 순간이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순간은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독일에 갔던 때이다.
교육청 기자단 소속으로 '통일'을 주제로 독일에 취재차 갔을 때
과거 동독과 서독의 국경지대인 조그만 도시를 다니면서
유럽한인단체 분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대학시절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글라라는
어느덧 몇십 년이 넘도록 독일에서 살아왔다.
유럽한인단체에 소속된 글라라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우린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럽 생활에 호기심이 가득했던 시골 소녀였던 나는
글라라의 삶이 낭만에 가득 차고,
동경으로 여겨졌다.
우린 버스에서 조그만 우주를 공유했고,
다음날, 독일의 작은 도시를 둘러보며 아침 산책을 함께했다.
글라라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로 나의 질문을 받았다.
나긋한 목소리와
상냥한 미소는
온 세상의 여유와 한적함을 품은 삶을 보여주었다.
호기심으로 무장한 나의 질문에 대답하던 그는
내게 말했다.
"예진아,
너는 우리의 희망이야."
글라라가 내게 해준 칭찬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마을을 밝히는 일출이 떠오르고 있었고,
선선한 아침 산들바람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동시에, 마을 곳곳에 종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내게 '희망'이라고 말해준 첫 순간.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음을 확인한 그 순간,
내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은 순간.
강원도 산골에 사는 소녀가,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무장한 소녀가
세상으로부터 '희망'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 순간 들었던 종소리는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 울려 퍼지던 그 종소리를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독일에 온 뒤
가장 먼저 마음에 둔 일정은 글라라를 만나는 것이다.
사람들을 매료시킨 유명한 관광지도, 자연도 없는
그저 독일의 한마을 일뿐이지만,
어릴 적 내게 잊지 못할 칭찬을 남겨준 선생님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작은 마을에 갈 이유는 충분하다.
나아가 글라라의 삶을 엿보면서
훗날 외국에서 노년을 보내는 삶은 어떤지 보고 싶다.
잊지 못할 칭찬을 받은 뒤부터
줄곧 글라라의 연락처를 간직해 온 나는
독일에 오기 전부터 그에게 연락을 한다.
나를 기억하고 반갑게 맞이해 준 글라라.
대중교통은 기차밖에 없는 그의 집에 어렵사리 찾으니,
나를 맞이한 글라라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누구.. 세요?"
그는 내 얼굴을 보고
나를 처음 보는 듯 대한다.
"글라라,
저 신예진이에요.
예전에 강원도 기자단으로 만났던 학생이요!"
"강원도 기자단..? 기억이 안 나네..
무슨 프로그램에 참여하긴 했었는데..."
내게 잊지 못할 칭찬을 남기고
여전히 나에게 힘이 되어준 글라라.
나는 글라라의 칭찬 이후로
그 순간을 응원이 되는 연료로 계속 사용해 왔다.
그러나 글라라 기억 속에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이자
더 이상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투명성일 뿐이었다.
"내가 예전에, 예진이라는 학생을 호스트 한 적이 있는데,
그 학생과 너를 혼돈한 거 같아."
소녀를 '희망'이라 표현한 그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칭찬 이후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희망'이라 여겨온 소녀는
세계 일주를 계획할 때부터
그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어렵사리 독일의 작은 마을에 다다라
그를 다시 만난 순간,
소녀가 맞이한 건,
오로지 자신만이 기억하던 과거의 순간뿐이었다.
"그래도, 오느라 고생 많았어.
들어오렴."
글라라 입장에서는
눈앞에 처음 보는 학생이 나타난 순간.
어색하게나마 환영하며 나를 반긴다.
그렇게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어릴 적 소녀에게 끝없는 용기를 안겨준 이와 소녀의
짧은 만남이 시작된다.
하루는 마을을 함께 산책한다.
교회 밖으로 나와 전경을 둘러보니 기도가 끝났는지,
종소리가 울린다.
문득 종소리를 들으니,
독일에 처음 갔을 때 들었던 종소리의 그 순간이 생각났다.
'너는 우리의 희망이야'라고 말해주던 순간.
글라라는 그 전후로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독일 길거리 곳곳의 냄새를 느끼며
조용히 그와 우주를 공유한다.
글라라는 1991년 대학을 졸업한 뒤
이후 신학을 공부하고자 독일로 대학원에 왔다.
당시 남자친구를 만나 결혼을 하여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서로가 한 영혼이 되는 거지.
서로 신뢰하고,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는 거야.
함께 도와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챙겨주고.
배우자는 나의 영혼이야.
자식이 없어도, 둘이만 있어도 재밌어.
하나님이 낳지 않게 해 주었으니
받아들이면서 사는 거지."
"글라라는 그런 영혼의 짝꿍을 만나서 행운이에요."
"나중에 나이 들면 돈보다 사람이니까.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야.
외관, 재력 이런 건 다 부질없더라."
조그만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
깨끗한 도로와 유럽식 도로 분위기,
종종 바닥에 붙는 나뭇잎까지.
나에게 꿈의 활력을 줬던 글라라.
조용한 마을 새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에게 꿈을 묻는다.
"글라라는 지금 꿈이 뭐예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
"저도 궁금해요!
어떻게 하면 잘 죽나요?"
"매 순간 감사해하면서 살아야지."
사각사각
오로지 새소리로 허공을 채운 소리에
조약돌을 밟으며 내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독일의 하늘은 유독 더 높고 푸르게 느껴진다.
"젊을 때의 꿈은 뭐였어요?"
"세상 모든 걸 추월한 수도자가 되고 싶었어.
모든 물욕, 고통에서 벗어나서 완벽한 수도자가 되고 싶었어."
"지금은 거대한 야망 없이,
눈앞에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와 대화할수록 나는 깨닫는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글라라는 없다는 것을.
"인간은 사약한 존재야.
언제든지 나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어."
언제나 사긋하고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희망을 말해주던
내 기억 속 인물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 정치를 비롯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마을에 얼마나 험악한 일들이 발생했는지,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내 기억 속 인물과 달리
남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채
기독교 신앙을 열렬히 믿으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세례 아래에서 살아가는
신실한 종교인이었다.
"글라라는 그런 험악한 세상 속에서도
희망을 믿나요?"
나에게 희망을 알려준 그.
그에게 희망을 다시 묻는다.
"믿지.
희망을 가져야지.
희망은 멀리 있는 게 아니야."
행여나
기억 속에서 희망을 알려준 이가
희망을 잃지는 않았을까,
오로지 세상에 나쁜 이들로만 가득 차다며
매 순간 사람들을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고만 말하지는 않을까
남몰래 걱정한 마음은
안도감으로 바뀐다.
'글라라도 희망을 잃지 않았구나.'
그는 이어서
독일에서 살면서 받아온 차별과,
정해진 삶의 틀처럼 사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름 있는 회사에 들어가서 경험을 쌓아야지.
취업, 출산, 양육을 하는 건 중요해.
열심히 일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지."
대화할수록
과거의 기억 속 글라라는 지워지고
새로운 글라라의 모습이 내 머리에 저장된다.
'예진아, 너는 희망이야."
중학생 시절, 마음속 깊숙이 남은 칭찬은
오로지 내 기억에 남아있지만,
눈앞에 펼쳐진 글라라는
내 생각과 다른 모습의 사람이지만,
시간의 영겁 위에
새롭게 쌓인 이 순간을,
새롭게 쌓인 글라라의 모습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새롭게 그려지는 글라라에게
나는 데이지 프로젝트를 말한다.
"삶의 이유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던 중에
세계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묻기 시작했어요.
지금 제 삶의 이유는 희망이에요.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는 희망,
내가 여행을 하고 있는,
여행을 꿈꾸는 삶 자체가 희망이거든요."
글라라의 데이지는 뭐예요?"
내게 희망을 알려준 글라라.
그에게 희망을, 삶의 이유를 묻는 순간은
약간 떨림이 함께 한다.
내 떨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글라라는 기억 속에 남아있던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지금 내 삶의 이유는
어떻게 잘 죽는지 고민하기 위해서야.
"어릴 적에는 물론 유흥을 즐기기도 했지
한때 신앙심에 가득 차서 초월한 수도사를 꿈꾸기도 했지만,
지금은 남은 여생을 그저 잘 마무리하고 싶어."
나에게 희망의 존재를 말해준 글라라.
그에게 희망을 묻는 순간은
나의 새로운 챕터로 나아가는
작은 발걸음이 된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짧다면 짧은 2박 3일 동안
나는 과거의 나와 만났고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며
미래의 나를 향해 나아갔다.
데이지 (신예진)
yejinpath@gmail.com
@tellmeyourdaisy : 인스타그램
https://www.youtube.com/@daisyshin:유튜브
https://blog.naver.com/daisy_path : 블로그
[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와 유튜브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