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순례길은 참 인생과 닮았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알베르게 봉사 부부

by 여행가 데이지


20231106_090851(0).jpg?type=w773 순례길을 걸으며, 비가 갠 뒤


걷고 또 걷는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계획 없이

그저 걷는다.

힘들면 잠시 머물러 휴식을 취하고

배고프면 잠시 무언가 먹는다.

마을에 도달하면 짐을 풀고 빨래를 하고

오늘 먹을 저녁을 위해 장을 본다.

기분 좋게 부른 배를 움켜잡고

잠이 오면 잠에 빠진다.

어떠한 생각이 개입할 여지없이

본능에 충실하게 지내며

순례길 위를 걷는다.

비워진 생각은

마음을 깨끗이 닦아내고

두 손을 가볍게 만든다.

단순한 삶의 방식 속에서

단순히 길 위를 걷는 과정에서

문득 내 머릿속에 들어온 깨달음을 음미한다.

본래 우리의 삶은

우리 존재 목적을 확인하는 거구나.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내가 보고 듣는 것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에 대해 살아나는 감각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낀다.



순례길 하루의 끝은 알베르게에서 마무리된다.

순례자들이 하루 동안 머무르는 숙소인 알베르게는

다음 마을로 떠나는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된다.

알베르게는 저렴한 숙박비로 순례자를 배려하기도

일부 알베르게는 기부 제로 운영하기도 한다.

수많은 발자취를 길에 남기고

오늘 하루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걸어온 순례자들은

짐을 풀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알베르게는 훈훈함으로 가득 찬다.

어김없이 아침에 일어나 걷기 시작한 5일 차.

기부제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알베르게 봉사자가 따뜻한 웃음으로 순례자를 반긴다.

순례길에 오른 이들을 접수하고 알베르게를 관리하는 게 주된 업무이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온화한 미소로 순례자들을 온기 있게 껴안는다.



20231014_204818.jpg?type=w386
20231014_204818(0).jpg?type=w386
Estella 마을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프랑스 부부.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프랑스 부부.

두 사람은 젊은 시절 걸은 순례길의 소중한 추억을 이야기한다.

다 큰 아이들 뒤로 여생을 동반자와 함께 보내고

순례자를 위해 봉사하며

가을을 보내는 표정에서 아늑함이 느껴진다.


1697723344595.jpg?type=w1 순례길 위에서 (by. 호빈)


800Km의 순례길을 걸으면 수많은 우연과 인연이 된다.

60살에도 건강히 순례길을 다니는 프랑스 할아버지,

'오! 코리아!'라며 한국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호주 청년,

휴가를 맞아 정기적으로 순례길을 찾는 오스트레일리아 청년

장애를 안고도 한계에 도전하는 여기까지.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은 소중하고 감사하다.

길 위의 모든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갖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아늑한 알 바르게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알베르게 봉사자 부부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내 삶의 이유는 두 가지야.'
첫 번째, 가족이지. 남편과 아이들은 나를 행복하게 해.
두 번째, 종교적 믿음이지. 크리스천이기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



순례길을 걸으며

미래에 대한 고민을,

지난 시간 동안 미뤄왔던 생각을,

지난 과거의 실수와 후회를,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침묵을,

함께 한다.

그러면서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웃음을 짓기도,

새로운 인연을 만나며 다른 우주와 연결되기도,

무섭게 떨어지는 우박에 지치기도,

비가 그쳐 보인 무지개에 감사한다


20231019_095544.jpg?type=w1 순례길을 걸으며 by. 호빈


그런 순례길은 참 인생과 닮았다,

순례길의 모든 순간이 다 햇살만 가득한 게 아니듯이,

우리 인생도 모든 순간이 찬란하지만은 않기에.

그 속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다른 순례자와 서로 마주치면 응원해 주고,

소중한 인연과 함께 노래 부르기도,

서로의 우주를 공유하기도,

작은 바에서 따뜻한 코코아로 몸을 녹이기도 하며

조금씩, 차근차근 앞으로 계속 걷는다.

알베르게 봉사자의 따뜻한 마음으로 몸을 녹인 뒤,

다시 산티아고를 향해 한 발 한발 앞으로 딛기 시작한다.






데이지 (신예진)

yejinpath@gmail.com

@tellmeyourdaisy : 인스타그램

https://www.youtube.com/@daisyshin:유튜브

https://blog.naver.com/daisy_path : 블로그


[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유튜브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01화삶의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