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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어항이 전부가 아니야

탄자니아 모시에서 만난 리차드

by 여행가 데이지

머무름은 연속적 삶 속에서 꼭 필요하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연속적인 삶들 속에서

순간을 잡는 방법은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현재 그 순간을 직접 음미하고 느끼는 것뿐이다.



IMG_7383.JPG?type=w773 케냐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에서





리차드의 모습

"데이지?"


킬리만자로 산행을 마친 뒤,

피곤에 사로잡힌 나를 반긴 건 리차드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동생 리차드야.

아브라함이 너를 극진히 대우하라고 말하더라고"


카우치 서핑을 통해 연락이 닿은 아브라함은

리차드를 통해 본인 집으로 초대한다.


"모시에서 하고 싶은 거 있어?"



이제 막 산행은 마친 나는

리차드에게 말한다.


"온 힘을 다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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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5m를 오르고 침대에 눕는 기분을 느껴보세요 - 그것은 천국




아침에 일어나

천장을 바라보며

여유를 한껏 음미한다.


리차드가 안내한 방은 편안하기 거지 없다.

묵혀있던 진흙과 먼지를 씻겨낸 뒤

쥐도 새도 모르는 잠에 빠진다.


하루 종일을 잤을까,

침대에 누워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 순간이 참 좋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매미의 즉흥곡을 듣는다.

아이작 뉴턴을 빙의해 천장의 좌표를 그린다.

하릴없이 멍 때리며 x축을 시선으로 따라가며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휴식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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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와 아브라함의 사무실


한참을 잠만 잤을까,

편안해진 몸으로 부스스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리차드가 인사한다.



"데이지, 잘 잤어?

필요한 건 없고?"



우린 출출한 배를 달래러 밖으로 나선다.

킬리만자로를 오르며 망가진 카메라와 휴대폰,

배낭을 다시 정리하며 필요했던 물품도 산다.


어느새 껌껌해진 모시 외곽 지역에서

유일하게 열린 문구점을 찾아다니기도

망가진 폰을 되살리고자 미용실에서 헤어드라이기를 빌리기도

비포장도로의 진흙길을 피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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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와 함께


"리차드, 나를 위해서 같이 가줘서 고마워"


"물론이지. 너는 우리의 손님인걸"


리차드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를 극진히 대한다.

이유도 없이 나를 귀하게 대해주는 그에게

괜스레 감사를 느낀다.

그 덕분에 껌껌한 모시의 거리는

전혀 두려움 없이 편안한 공간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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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파띠(Chapati)는 평평한 빵이다. 주로 밀가루, 물, 소금 등을 반죽하여 팬에서 구워 만든 탄자니아의 주식이다.



동네 천막 속으로 들어가니

조그만 짜파띠 가게가 나타난다.


작은 의자에 앉아 짜파티 제조 과정을 바라보며

어릴 적 시장에서 호떡 만드는 아주머니의 손길을 느낀다.


전구 조명 하나에 의지해 어둑한 천막 속의 짜파띠는

따뜻하게 구워져 우리 손으로 들어온다.


커다란 입으로 미소 짓는 리차드를 바라보며 말한다.


"맛있겠다!"


함께 짜파띠를 먹으며

리차드는 호스트 아브라함이 운영하는 여행사에서 일한다.

자전거 투어의 가이드로 지내며 킬리만자로와 사파리를 오간다.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게 좋아"


커다란 미소로 그는 말한다.

그의 미소는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킬리만자로를 다니며 일하는 것이 행운이라고 덧붙인다.


모시에 오기 전,

조그만 마을에서 정원 가꾸기와 잡일을 하던 리차드.

그는 정원 소유주에게서 제공받은 음식으로 급여 없이 하루를 살아갔다.

숙식 제공 이외에 50달러의 월급이 전부였던 그는

영원히 정원을 가꾸면서 살 길밖에 없었다.



아무런 저항없이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던 중

아브라함은 리차드에게 말했다.


"리차드, 킬리만자로에 가자.

우리, 자유로워지자!"



아브라함은 리차드에게 킬리만자로에서 할 수 있는 새 직업을 제안했다.

작은 마을에 머물지 말고, 모시에 와서 자유를 꿈꾸는 아브라함.

그의 제안은 리차드의 인생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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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와 함께 짜파티를 먹던 순간들


리차드는 모시에 머무는 동안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내가 일어나면 맛있는 짜파띠를 만들고

내가 무언가 필요하면 도움이 닿는 데까지 도와준다.


고구마와 오믈렛을 만들기도

맛있다는 고깃집에서 고기를 가져오기도

짜파띠에 멸치 양념을 더하기도

따뜻한 차와 함께 짜파띠를 주기도 한다.


원재료에 충실한 탄자니아 음식을 맛보며

리차드의 정성을 느낀다.



"탄자니아 음식들은 원초적인 거 같아.

멋들어진 양념이나,

과장되게 느껴지는 디자인이 없잖아."


서양식의 미각 욕심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이들의 투박함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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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리차드의 모습

"자전거를 타고 탄자니아를 누비는 게 참 행복해"


아브라함을 따라 모시로 온 뒤에

리차드는 본인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했다

그는 자전거를 타며 돈을 버는 직업을 사랑했다.

그 뒤로 리차드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자전거 라이딩을 연습했다.

완전히 자전거에 홀린 것이다.



"나는 자전거 라이딩으로

킬리만자로를 5시간 안에 다녀오는 게 목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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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는 올해(2025) 26살이다

자전거는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동시에, 그에게 꿈을 주었다.


리차드는 매일 정원을 가꾸던 과거에서 벗어나

매일 자전거를 타고 날아다녔다.


그는 가이드로 자전거를 타며 돈을 벌고

꿈을 꾸는 존재로 자전거 관련 목표를 향해 간다.

아브라함이 지난 저녁, 내게 말한 게 떠오른다.



"자전거를 타고 가이드 하는 게 마냥 쉬운 게 아닌데,

리차드는 어찌나 그렇게 잘 타던지.

나는 리차드가 5시간 안에 킬리만자로에 다녀오는 걸

해낼 거라고 확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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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작은 어항에서 태어난 물고기는

자기가 있는 작은 어항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과거 리차드는 작은 어항 속 물고기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모시에 도착해 시작한 새로운 삶은

광활히 펼쳐진 바다가 되었다.


한정된 환경에서 자라온 물고기는

새로운 곳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리차드는

작은 어항 속에서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잠재력을

바닷속에서 발견한다.



자신을 한정 짓던 작은 환경에서 벗어난 그는

새로운 목표에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매일을 훈련해 간다.


"리차드,

자전거에 홀린 이유가 뭐야?"


나의 나라인 탄자니아를 빛나게 하고 싶어서야.

내 삶의 이유이기도 하지.
내가 킬리만자로를 5시간 안에 다녀오면서
탄자니아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더 강한 탄자니아를 만들고 싶어.




언제나 커다란 미소로 나를 대해준 리차드.

그의 대답에서 굳건함을 느낀다.


그가 가진 커다란 미소 너머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리차드의 모습을 떠올린다.


탄자니아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한 달 50달러도 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던 그가

모시에서 자전거를 타며 가능성을 발견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탄자니아를 빛내는 모습.


그의 환한 미소는 나는 대답한다.



"너는 분명 해낼 거야"






데이지 (신예진)

yejinpath@gmail.com

@tellmeyourdaisy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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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daisy_path : 블로그


[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유튜브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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