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가 데이지 Jul 21. 2024

인도네시아Ⅰ두려움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겨

데이지 버킷리스트 ③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서핑하기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의 어느 길 위에서

여행이란 무엇일까?


여행은 

사소한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마법이다.

지나가다 멈추어 

건물에 난 흠집이 아름답다 여기는 마법이다.

어제와 똑같은 하늘을 보고 

오늘 처음 봤다는 듯 감사하게 만드는  마법이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강인한 생명력에 

길을 멈춰 기특한 줄기를 칭찬하는 마법이다.

상대방 세월 사이로 생긴 주름을 보며 

그를 존경하게 하는 마법이다.



이 순간의 감동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여행의 매력이다.





*일러두기: 글 속 '호스트'는 여행자 커뮤니티 '카우치서핑'을 통해 만난 호스트를 의미합니다.



비행기 동체는 새벽 동안 하늘에 떠있다 아침이 되어 싱가포르 활주로에 닿았다.

어두컴컴한 밤공기를 뚫고 행진한 비행기는 

오묘한 새벽공기의 빛깔을 흡수하며 승객들을 새로운 대륙으로 인도한다.


인도네시아로 가기 위해 싱가포르 공항에서 하버프런트로 향하는 지하철,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길쭉한 다리에 

볼록 튀어나온 뱃살을 가진 흑인 중년과 살짝 눈이 마주친다.

중년은 하버프런트에 간다는 나의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해당 역에 도달했을 때 내게 일러준다.


지하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습한 공기층과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냄새가 어우러져 싱가포르의 첫인상을 만든다.


중년의 온화함 때문일까, 싱가포르는 내게 산뜻하고, 약간의 세련됨이 가미된 인상으로 다가온다.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 한 모습

대만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가 한국에서 계획한 마지막 공식 일정이다.

싱가포르 이후에 어디로 향할지, 무슨 일을 할지는 아무도, 나조차도 모른다.


한국에서 정해둔 계획 끝에 서 있으며 동시에, 

미지의 여정을 시작하는 순간에 놓였다.


축적된 삶의 피로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일들,

무언의 압박과 일본과 대만을 여행하며 생긴 새로운 일거리들과 함께.

여행하며 새롭게 시작할 여러 기획도 있다 보니 

또다시 시간에 끌려가는 지난날의 내 모습이 보였다.



사진: Unsplash의 Bankim Desai

나비가 되려는 애벌레는 여러 차례 탈피한다.

마지막 탈피 이후, 


몸의 변형이 이루어지는 변태가 되기까지 

번데기 속에 머무른다.


몇 주 혹은 몇 달간 나뭇가지에 매달린 번데기는 나비의 날개를 펼치며 새 삶을 시작한다.


내게도 조그만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는 나비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변태할 준비가 필요했다.



몇 달 동안 번데기 안에서 영양을 보충하는 나비와 같이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건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안 하는 시간'이었다.


바탐이 인도네시아에 있는지, 호스트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 관심이 아니었다.

절실히, 열렬히 누워 천장만 바라볼 시간만이 오로지 내 관심이었다.


바탐(Batam)은 싱가포르 아래 위치한 인도네시아의 한 섬이다.


바탐이란 섬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이다.

단지 몇 달 전 아무 생각 없이 예매한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단지 싱가포르와 가깝다며 연락이 닿은 호스트 집이 바탐이었다.

바탐이 인도네시아인 줄도 몰랐다.


당연히 비자 준비도 안 했으니, 인도네시아 선착장에 도착해 급히 도착 비자를 발급받는다.

싱가포르에서 인도네시아로 넘어가는 페리 안에서


유람선을 탔던 기억의 끝자락은 초등학교 때 한강에서 탔던 유람선이다.

어쩌면 그 기억이 유람선을 탔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일 것이다.

한강대교에서 뿜어 나오는 물줄기는 형형색색의 빛을 타고 어린 내 마음으로 들어왔다.

빛 한줄기 한줄기에 탄성을 지르며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도시에 처음 상경한 촌뜨기가 지나가는 자동차에도 탄성을 부르는 격이다.

빛이 한강의 울렁이는 물결에 비추어 내 마음을 적셨다.


인도네시아로 향하는 유람선에 올라 

내가 연신 내뱉은 감탄은

어린 시절 한강 유람선을 타며 

멈추지 못한 탄성과 필적했다.


탁 트인 바다를 향해 전진하는 유람선 위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굽이치는 작은 물결 하나에도 

내 온몸의 세포는 반응했다.

흡수되지 않고 산란한 파란빛은 

강렬한 햇빛에 반사되어 바다를 빛나게 한다.

바다를 돌진해 국경을 넘는 경험도 

내게 생소하고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바다는 엔진과 힘을 합쳐 유람선 동력을 만든다.

산란한 여러 빛이 동력에 섞여 하얀색의 거품을 만들며 나아간다.


거품은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하얀색의 길은 한 마리의 흰고래 같다.

유람선이 전진하며 슬쩍 내보인 꼬리와도 같다.

우리가 걸어온 길의 흰색 생크림이 왕창 소용돌이가 되어 우리의 흔적을 남긴다.


청록색과 푸른빛이 어우러진 바다 뒤에서 따스한 햇살과 만난 빛.

시원한 바다 냄새 위로 나름의 강함과 함께 부는 바람. 햇살 사이로 진 그늘.


난 이 순간을 사랑하고 있다.







호스트 나빌라의 방

바탐에서 일주일 동안 계획 없이 

누워있고, 잠만 자고, 천장을 보며 지냈다.


오랜만에 낮 12시에 눈을 떴다.


마치 몇 달을 이미 살았다는 듯이, 

호스트 방에는 익숙한 향이 느껴진다. 

시각과 감각으로 느끼는 좋은 향이다.


집 근처 사원에서 울리는 무슬림 기도 소리를 

이불 삼아 천장을 바라보며 멍을 때린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들락거린다.

지금 내가 만나오는 사람들은, 

훗날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될지,

나를 스쳐 간 인연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소중한 인연들과 보낸 지난 시간은 어땠는지.


서울에서 살아온 방식으로 하루하루 무언가에 질질 끌린 채로 살아온 지난날.

여행 출발을 하기도 전에 온몸의 진이 다 빠져있던 나 자신.


분단위로 살던 내가 생각을 비우고 아무 계획 없이 침대에 그저 누워있는 지금 이 순간.

그 속에서 내 삶에 공간이 조금 보인다.


나는 전력질주 자동차로 계속 달리고 있었구나. 

중간에 멈추기도 해야 했는데.


나는 얼마나 여유를 잊고 살아왔던 것인가.

가만히 누워 스쳐 간 인연과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이 시간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이 순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순간의 여유도 사랑스럽다.

여유를 음미하며 꼬깃 접어둔 버킷리스트 종이를 펼친다. 


서핑 배우기


아름다운 인도네시아 바다에서, 서핑을 배워볼까.





"파도가 오면 피하려고 하지 말고, 파도 속으로 몸을 맡겨야 해."


인도네시아 발리 꾸따비치(Kuta Beach)에서 버킷리스트인 '서핑배우기'를 했다.ㅅ.


서핑하다 보면 커다란 파도가 덮쳐올 때가 있다.

몸을 덮치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파도를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파도에 휩싸이게 된다.


금방이라도 삼킬 것 같은 파도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면, 

파도는 포근하게 나를 감싼다.


파도와 힘껏 포옹하고 수면 위로 올라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다는 잔잔하게 날 바라본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힘찬 물결이 파도가 되어

거대한 장벽같이 내 앞에 당도할 때 증폭된 두려움은

잠시 파도 속에 몸을 맡겨 


파도의 따뜻한 포옹을 받고 일어나면

거대한 장벽은 온데간데없고, 

파도를 마주한 내 용기만이 남아있다.


용기는 내게 말한다.


"지나고 나니 별거 아니지?"


서핑은 파도와 맞서는 힘을 알려준다

서핑의 원리는 삶의 원리와 일직선상에 있다.


나를 가로막는 두려움은 피할수록 내게 더 자욱한 상처를 남긴다.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두려움은 나를 주저앉게 한다.

피하려고 움직일수록 두려움은 더욱 크게 나를 덮쳐온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나면,

두려움이 나를 덮친 게 아니라 

나를 따뜻하게 감싸는 것임을 깨닫는다.


두려움을 마주한 용기 앞에서 나는 말한다.


"지나고 나니 별거 아니네"



바다를 가진 나의 고향 강원도 고성. 

그곳에서 매일 바다를 보며 자라왔지만, 서핑은 오로지 TV 속 이야기였다.

우람한 몸매에 서핑보드를 들고 가는 이들은

파도 위에서 자유자재로 춤을 췄다.


현란한 파도와의 춤을 추는 그들에게서 보이는

바다의 시원한 웃음을 동경한 나의 어린 시절. 


꼬꼬마 소녀는 아름다운 인도네시아 발리의 파도를 마주하며

서핑을 하게 되리라 상상을 했을까.


오랫동안 꿈꾼 서핑을 배우며 어린 시절의 나와 만났다.

어린아이인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서핑은 말한다. 



"두려움이라는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겨.


사람들은 파도가 오면 피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크게 다쳐.

파도가 올 때, 파도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겉으로 아무리 요동쳐도 그 속은, 무엇보다도 고요하거든.



바다와 파도 그리고 삶

살다 보면 받기도 하고 거부도 당하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가끔은 회복이 되기도 한다. 삶이란 항상 불안하고, 고난과 역경을 피하지 못하면 괴롭다. 하지만 산다는 건 바로 그런 거다. 물러나고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인생의 시간을 미리 알고 싶을 때도 있다. 미리 안다면 덜 고통받을 거라 자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풍요로운 시기와 궁핍한 시기가 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극복하면 될까? 방법은 간단하다. 파도와 같은 삶을 바란다면, 파도처럼 살아가면 그뿐이다. 파도는 물러나고 밀려오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산다는 건 그냥 그런 거니까. 파도처럼 살고자 한다면, 우리 삶에 다가오는 모든 것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자. 지금 이것이 흐르는 물인지 고인 물인지, 밀물인지 썰물인지 미리 알 필요는 없다. 그저 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바다는 파도가 오지 않도록 억지로 막거나 무리하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냥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수많은 연주자는 실제로 교향곡을 작곡한 적이 없어도 자기만의 곡으로 연주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파도의 주인이 아니면 어떤가. 파도를 지배하는 주인은 아니어도 당당히 항해할 수 있다.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있듯 인생에도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다. 그 움직임을 거스르기보다는 곁에서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낫다. 노련한 바닷사람처럼 바람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바람을 역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은 흐른다>_로랑스 드빌레르 Laurence Devillairs 1965




추신: 서핑 이후에 먹는 미고랭은 천국의 맛이다.



https://youtu.be/I3_sPFMqsNM? si=4 PRTl4 A9 g7-AfXwI




데이지 (신예진)

enjoydaisypath@gmail.com

@the_daisy_path : 인스타그램

https://blog.naver.com/daisy_path : 블로그


[나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어릴 적 꿈인 세계여행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이루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블로그와 유튜브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전 03화 대만Ⅰ여행은 사소한 것도 아름답게 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