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은 비려
시나몬과 호두로 그리고 사과로
비린 맛을 덮고 싶다
사람들은 말해
나는 당근이라고
근데 농부는 말해
새싹이 나봐야 안다고
나는 당근이 아니고 싶어
비린 맛이 없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는 내가
싫어
1
우울을 느낀다. 병원에 가니 진단코드를 준다. 소위 말하는 우울증이다. 오래도록 우울을 느꼈는데 다들 날 보고 밝다고 해주니 헷갈릴 때가 있다. 오래도록 우울을 느껴와 우울한 생각이 내 생각인 줄 알았는데 우울증의 증상이란다.
마음 한 켠에선 나도 밝고 싶다. 과장된 행동을 억지로 하며 우울한 내 모습을 감춘다. 그렇다고 내가 우울증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닌데.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는 완치 되어야 아는 걸까. 나는 밝고 싶다. 우울한 사람이 아니면 좋겠다. 그런데도 우울증이라는 병명을 놓지 못하는 내가 싫다.
2
내 비린 열등감을 감추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럴 때면 타인의 낯을 빌려온다. 친절하고 다정한 시나몬과 호두, 그리고 사과의 맛으로 비린 당근 맛을 가린다. 그러면 내가 이러는 줄 모를 테니까.
모든 일에는 맥락이 있다. 갑자기 타인의 낯을 빌리는 건 아니다. 나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스스로 모르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거지.
당근에게 당근 맛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건 당근일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