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 쓰기를 아까워해 아플 때 병원조차 가지 않는 아이였다. 그렇다고 물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자신에게 쓸 돈이 제한 되어있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마카롱이 먹고 싶었다. 모의고사를 치고 나서 받은 용돈으로 마카롱을 사먹을 수 있었지만, 옆에 슈퍼마켓에 들렸다. 가서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다. 오래도록 가성비를 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램당 얼마인지 적혀있는 가격표가 나에게는 고마웠다. 그렇게 고른 건 초코파이였다. 가장 많고, 가장 싼 초코파이. 조그마한 것 하나에 천원을 훌쩍 넘는 것보다 훨씬 가성비 있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참동안 울었다. 그 조그마한 마카롱 하나가 뭐라고, 돈이 뭐라고. 먹고 싶은 걸 고르지 못한다는 박탈감이 충격적이게 다가왔다.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똑같이 용돈이 없었지만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에는 풍요롭게 살았다. 시와 그림 같은 예술적 소양도 풍족했고, 수요일이면 외식을 했다. 가끔 아쿠아리움도 놀러가고, 놀이공원도 갔는데,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서부터는 그럴 수 없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돈이 많았지만 그런 걸 즐기시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늘 말했다. 내가 돈을 쓸 줄 몰라서 안 쓰는 줄 아냐고.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는 게, 집안 자식들의 빚은 할아버지가 다 메꿔주고 있었다. 그걸 어린 나이였던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대전으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는 시장에서 와플 두 개를 학교 점심시간에 들고 와 나와 내 단짝에게 나눠주곤 했다. 그 정도의 여유는 있으셨다. 어느 순간부터는 와플도 없었다.
클수록 돈이 필요한 곳이 많아졌다. 아직도 학생일 뿐이었지만 친구들이 놀러가자고 하는 날이면 나는 빠져야 했다. 동물원 입장료를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에게 생일선물 대신 편지로 떼우는 날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친구들은 사라져갔다. 자연스레 멀어졌다. 돈 때문에 내가 거리를 뒀다. 이렇게 말해야 내 구질구질함이 조금이나마 희석될 것 같다. 그래, 너희랑 놀려면 돈이 들어, 돈이 없어서 나는 너희랑 놀 수 없어. 돈이 없다는 건 친구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나? 그때부터 돈에 대한 동경이 커졌다. 달고나 하나 사먹을 수 없어서 친구들이 사먹는 걸 구경하던 나, 마카롱과 초코파이 중 마카롱을 살 돈이 있음에도 초코파이를 사먹어야했던 나, 이젠 친구들을 챙겨줄 수 없어 멀어져야 했던 나. 모든 내가 지나갔다.
이제 와서 나는 그림을 사서 집에 걸어놓고, 보석을 사서 자랑하고, 꽃다발을 사서 주변에 선물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돈이 모자라 본 적 없는 아이처럼 군다.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돈을 쓸 수 있다. 갖고 싶으면 돈을 모아서 사면 되고, 안 되면 할부로 긁으면 된다. 물건을 고를 때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드는지 여부다. 예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 친구들 생일이면 비싼 향수 같은 걸 사준다. 놀러가고 싶은 곳 있으면 KTX타고 훌쩍 떠나면 되고, 폴라로이드 필름을 잔뜩 사서 추억을 남겨온다. 사고 싶은 책이 생기면 산다. 책장에 자리만 차지하지만. 이런 모든 걸 옛날에 즐길 수 없었지만 이젠 즐길 수 있다.
해피엔딩일까? 옛날에 즐길 수 없었던 걸 보상심리처럼 이제와 즐긴다는 게. 여전히 나는 먹을 것에 돈을 많이 쓰지 못한다. 아직도 놀이공원에 가면 솜사탕이 먹고 싶어도 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솜사탕 기계를 사면 더 싸게 먹을 수 있는데, 원가를 생각하면 이게 손해보는 것 같아서 차마 살 수가 없다. 츄러스도, 아이스크림도 마찬가지다. 마카롱과 초코파이를 고르던 아이가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이다. 솜사탕은 눈물에 젖으면 녹지만, 마카롱과 초코파이를 저울질하던 아이는 눈물에도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