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논어산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승주 작가 Aug 09. 2018

황현산 선생 덕분에 쓸 수 있었던 글

청소년 글을 '청불 글'로 만든 황현산 선생의 힘

청소년을 위한 공자 해설서를 쓰다가 '공자의 생활난'이라는 김수영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제목에 '공자'만 들어갔을 뿐 공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시였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가 마음에 들어서 공자의 생활난과 관련해서 살리고 싶었다. 고민하다가 황현산 선생의 글을 발견했다. 공자의 생활난에 대해 분석한 글이다. 여러 번 읽고 힘을 내서 글을 썼지만, 이미 글은 '청불'이 되어버렸다. 책에 실을 수도 없는 글이니 여기에라도 싣는다. 황현산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너무 일찍 가셔서 아쉽네요. 아래 글을 곱게 태워서 보냅니다. 


내가 유일하게 읽었던 황현산 책 《밤이 선생이다》



공자의 생활난이 그렇게 심했나?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대학 시절 김수영, 이상, 윤동주, 정지용 등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시인들의 시집을 읽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한자’였어요. 지금은 대부분의 시집에 한글 표기나 한글 병기가 돼 있어서 부담 없이 작품을 읽을 수 있었지만, 제가 대학 다니던 90년대만 하더라도 한자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어요. 교양인이라면 이 정도 한자는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듯이. 당시 교양인 축에 끼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했던 저는 여름 내내 한자사전과 국어사전을 펼치고 ‘문교부 교시 1800자’를 열공했어요. 그때 했던 한자공부가 한문공부가 되었고, 《논어》, 《맹자》, 《사기열전》, 《삼국사기》 등을 해석하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풀이 눕는다’는 말이 《논어》에 실려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깜짝 놀랐어요. 이 말은 《맹자》에도 실려 있어서 처음에는 맹자가 한 말인 줄 알았죠. 김수영의 시에서 만난 《논어》 구절이 반가웠고, 한편으로는 《논어》도 사실상 ‘시(詩)’구나 하고 느꼈죠. 《논어》에서 바람과 풀을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로 비유했다면, 김수영의 「풀」은 지식인과 대중의 관계로 볼 수 있을까요? 지도자와 지식인이 더 똑똑할 것 같아도 ‘욕망이 맑은’ 대중들이 더 지혜롭다는 건 알만 한 사람은 다 알죠. 김수영 시인은 공자에 관한 또 하나의 시, 「공자의 생활난」을 썼습니다.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의 시 「공자의 생활난」의 시어들을 따라 걷는 기분으로 공자가 어떤 고생을 해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꽃이 피기가 무섭게 장난은 시작됐지 


저희 집 텃밭에는 하귤이 두 그루 있습니다. 재작년 폭설로 열매가 다 떨어졌지만 올해는 실팍하게 자랐어요. 재작년의 일이었던가요? 장모님은 말씀하셨죠. 꽃이 피기 전에 열매를 다 따라고. 며칠 후 정말 꽃이 피었어요. 그리고 이어서 작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장모님의 말씀은 어린 열매가 양분을 빼앗기지 않도록 다 자란 열매를 빨리 퇴장시키라는 뜻이었습니다. 공자라는 열매는 양분을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스스로 자라야 했죠. 


아버지를 세 살 때 여의고 어머니마저 열일곱 살 때 여의었던 공자는 부모님을 합장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묘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아버지의 묘지 위치를 아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장난입니다. 공자는 어머니의 임시 묘를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진짜 묘지에서 장사지내듯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 일이 소문이 났는지 공자에게 감동한 노파가 아버지의 묘지 위치를 알려주었기에 공자는 부모님을 합장(合葬)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삼년상이 다 끝나지 않았던 때 노나라의 실권자 계손씨는 명사(名士) 자제 모두를 초대합니다. 이 행사는 의례적인 일이 아니라 사족(士族) 집안에 대한 심사의 기능을 했기에 불참은 곧 신분 강등과 비슷한 의미였습니다. 17세 소년 공자는 계손씨에게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주변에 상의할 어른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상복을 입은 공자는 고민 끝에 연회 참석을 결정합니다. 예(禮)에 어긋나는 선택을 한 것이죠. 하지만 양호라는 인물에 의해서 문전박대당하고 맙니다. 상복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명사(名士)’로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신분 강등이며 앞길이 막힌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공자는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외로움에 치를 떨었습니다. 이것이 공자에게 찾아온 두 번째 장난이었습니다. 


송나라에서 공자는 19세에 계관씨라는 송나라 처녀와 결혼했고 곧바로 노나라로 돌아옵니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공자는 이듬해에 아들을 낳죠. 이 때 노나라의 제후인 소공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습니다. 잉어 한 마리를 하사받은 것입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잉어’를 뜻하는 ‘리(鯉)’라고 짓고, 자(字) 또한 ‘백어(伯魚)’라고 지었습니다. 당시 공자의 학문은 노나라에서도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수능 만점자나 명문대 수석입학자는 뉴스에 나오잖아요. 소공의 입장에서는 의례적인 선물이었을지 몰라도 공자에게는 양호에게 빼앗겼던 신분을 소공에게 다시 찾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뜻 밖의 영광을 얻은 공자는 평생 동안 소공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논어》에서는 진(陳) 나라의 검찰총장 격인 사패(司敗)가 “소공이 예를 알았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공자는 “예를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죠. 사패는 검찰총장답게 소공의 비위사실을 들먹이며 공자를 흠집 냅니다. 노나라와 형제의 나라인 오(吳)나라에서 아내를 얻었으니 오희(吳姬)라고 불러야 하건만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오맹자(吳孟子)라고 불렀으니까요. 진사패는 공자의 제자 무마기에게 “군자는 편당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군요.”하고 뼈아픈 지적을 하죠. 공자는 특유의 유머로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했습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 만약 잘못한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반드시 알아차리거든.” - 《논어》, 「술이」 편


공자는 소공의 허물을 자신이 뒤집어쓸 정도로 존경심을 나타냈습니다. 세상의 장난질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알차게 자라나 설 수 있었습니다. 잉어 선물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나라 상경 계평자의 관리로 채용되었으니까요.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의심의 눈총도 여러 대 맞고


쓰르라미와 산비둘기가 대붕(大鵬)의 비상을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힘껏 떨쳐 날면 느릅나무 가지에 이르는데, 어떤 때는 닿지도 못하고 땅에 떨어질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구만리 남쪽으로 간다는 말인가?” - 《장자》, 「소요유」 편


“튀어나온 못은 박히기 마련”(일본속담), “모난돌이 정 맞는다”(한국속담)라는 속담들은 개인과 사회가 그만큼 긴장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공자는 튀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논어》에서 공자의 말을 보면 당시 유행어, 지금으로 치면 ‘속담’을 적극 활용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은 사람처럼. 송나라 주희가 주석을 모아 간행한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의 서문에는 “일반 대중이 나날이 사용하는 생활용어나 지켜야 할 덕목 안에서 학문한다”고 선언했죠. 이것은 공자의 정신을 본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공자가 튀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철학자는 스피노자처럼 망치를 들고 자기 주변의 못된 편견이나 관습, 타성 등을 부서야 하니까요. 공자는 합리주의자였습니다. 


“마면(麻綿)이 예에 맞다. 오늘날에는 순면(純綿)을 쓰는데, 검소하기 때문에 나는 여러 사람이 하는 대로 따르겠다. 대청 아래쪽에서 절하는 것이 예이다. 지금은 위에서 절하는데,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여러 사람의 경위와는 다르지만 나는 아래서 절하는 쪽을 따르겠다.” - 《논어》, 「자한」 편


당시 사람들이 쓰고 다녔던 모자 면(冕)은 무명실로 만든 순면이었습니다. 대마로 만든 마면은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사치스럽기에 귀족 등 구매력 있는 사람만 쓸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공자는 둘다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걸 택했습니다. 공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같은 지위에 있으면서 마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꽤 무안했을 것 같습니다. 공자의 망치 소리가 마치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 같아서 몹시 불편했었겠지요. 공자의 존재 자체가 그랬을지도 몰라요. 공자처럼 학식이 뛰어나고 명성이 있는 인재를 채용하고 급여를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투자가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감님께서 천리를 마다 않고 오셨으니 우리 위나라에 어떤 이로움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맹자》, 「양혜왕 상」 편)라고 했던 양혜왕의 말이 모든 권력자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자가 부화뇌동하는 사람은 아니죠. 자연스레 갈등이 생겨나고 공자가 배척당하는 상황까지 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염유가 자공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위나라 임금[출공(出公)]을 도와주실까요?” 자공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가 여쭤보도록 하죠.” 자공은 스승의 방에 들어가 물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옛 현인이시지.” “원망의 마음이 있었습니까?” “인(仁)을 추구하다가 인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했겠느냐?” 스승의 방을 나온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겁니다.” - 《논어》, 「술이」 편


위나라 영공이 죽고 어머니 암살 미수 사건으로 망명한 전(前) 태자 괴외의 아들이 왕이 된 위나라는 정변의 먹구름이 일었습니다. 위나라가 공자를 초청한 것은 호전적인 영공의 대외정복전쟁에 도움을 받고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영공의 면전에서 거부의 뜻을 밝히고 위나라에서의 공직 생활이 끝났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제자들은 공직을 이어가죠. 자로와 자고는 위나라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염구는 상경 계강자에게 스카웃됩니다. 염구는 자공의 특별한 부탁을 받고 노나라에서 능력을 발휘해 공자도 관직에 추천을 받습니다. 하지만 모국 노나라의 관직 역시 대가를 기대한 거래였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계씨는 옛적의 주공보다 부유했음에도 염구는 가신으로서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여 부를 더욱 늘려주었다. 이를 본 공자가 말했다. “내 제자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울려 성토하는 게 좋겠다.” - 《논어》, 「선진」 편


뒤에 설명드리겠지만 염구는 유능하기 때문에 가장 치명적인 제자였습니다. 당시 귀족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냥과 전쟁, 그리고 사치였습니다. 향락비는 금세 동났으며 이를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이 감당하기 힘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모든 항의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계강자는 백성의 신망을 받고 있던 공자를 선전의 도구로 이용함으로써 생뚱스러운 증세(增稅)정책에 대한 백성의 저항을 무마할 계획이었습니다. 딴에는 공자에게 수년간 많은 급료를 지불했으니 이제는 환급받을 때라고 여긴 것 같습니다. 공자는 증세를 한사코 반대했지만 계강자는 강제로 시행했고 제자 염구는 상급자를 위해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춘추시대 모든 나라들이 공자를 이런 식으로 취급했습니다. 성인(聖人)이라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저마다 자신들의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만 혈안이었죠. 



수난은 언제나 공자의 몫 


“만약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1년 안에 웬만큼 이루어내고 3년이면 성공을 거둘 것이다.” - 《논어》, 「자로」 편


공자는 이 말을 한 비슷한 시기에 “만약 왕도를 실현하는 임금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한 세대 이후에야 혜택이 미칠 것”(「자로」 편)이라고도 말했죠. 《논어》 안에는 서로 부딪히고 모순되는 구절이 꽤 많습니다. 그 까닭은 공자가 직접 쓰지 않았고 제자들이 들은 대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군주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후원자를 잃게 되니까요. 기원전 496년에는 광(匡) 지역에서 닷새 간 구금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양호와 생김새가 비슷해 오해를 받은 것이지요. 공자는 “하늘이 아직 문명을 버리지 않았는데 광 지역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선진」 편)라고 말했죠. 4년 뒤인 기원전 492년에는 사마환퇴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공자가 강의하고 있던 나무를 넘어뜨리며 위협을 했죠. 이때도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술이」 편)라고도 말했습니다. 글로 쓰여서 당시의 상황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매우 다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통 유가 출신인 왕망(王莽, 기원전45~기원후25)이라는 정치인은 공자의 말을 따라 “한의 병사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지만 칼날에 죽고 말았으니까요. 후세의 학자들은 공자의 인간적인 면과 감정을 우아하게 포장하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공자는 고립되고 말지요. 《논어》를 읽으면서 주의할 점은 공자와 제자들의 감정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표정과 몸짓, 말투에 나오는 미묘한 감정은 글에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상상력을 동원해서 보려고 하면 보이거든요. “삼군(三軍)에게서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필부(匹夫)에게서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자한」 편)라는 말은 그저 멋지게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니라 애끓는 마음에서 토해낸 절창(絶唱)입니다. 


공자의 꼿꼿함은 당시 제후들뿐 아니라 그를 따르던 제자들 입장에서도 매우 답답했을 것입니다. 염구 같은 제자나 친구들이 갖은 고생 끝에 권력자의 마음을 공자에게 돌려놓고 회견을 주선해놓으면 그는 입바른 소리를 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자신의 뜻을 용감하게 표현했으니까요. 제후들이 공자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기용하면서도 정작 공자 본인만큼은 기용하기를 꺼렸던 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제자들 입에서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합니다. 공자는 무슨 마음으로 이와 같은 수난을 자초하는 것일까요? 맹자가 그 마음을 잘 알았어요. 맹자의 제자들도 꼿꼿한 스승에게 “한 자만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는 말도 있는데 제후를 만나서 잘 되면 왕도를 실현하고 못해도 패자(霸者)는 만드실 수 있지 않을까요?”(《맹자》, 「등문공 하」 편)라고 하소연하기까지 했죠. 맹자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는 말은 순전히 이익을 가지고 하는 말이니, 그런 식이라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편다고 하더라도 좋단 말인가?” - 《맹자》, 「등문공 하」 편


맹자는 “자신을 굽혀서 다른 사람을 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공자는 자신이 이런 수난을 당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공자가 자신의 평생 경험으로 말하고 싶은 메시지죠. 그 뜻을 취해서 재구성해보았습니다. 


제자들아, 후세 학자들아 보아라. 내가 어떻게 수난을 당하였는지. 나는 나의 일생 동안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은 고생과 비난을 무릅쓰는 까닭은 자네들에게 이 세상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수난을 제대로 바라보고 각자의 과제로 삼도록 해라.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4.3의 완전한 해결'이라는 말이 불편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