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논어산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승주 작가 Jan 17. 2022

'가르쳐준다'와 '배워준다'

주역과 논어에서 경고하는 교육의 함정

배워준다


어린이와 청소년, 성인을 대상으로 인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주제가 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과 수업하면서 '배워준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 깊어진다.


'배워준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낱말이다. 하지만 현실속에서는 '가르쳐준다'는 의미보다 '배워준다'는 의미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렇다면 '배워준다'는 의미는 존재할 뿐만 무섭게 세력을 넓히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배워준다'는 말과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한, 그게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지 알기란 어렵다.


'배워준다'는 말에 대해서 언급한 문헌은 주역인데, 배움에 관한 대표적인 괘인 몽괘에는 이런 말이 있다.


몽蒙은 형통하니 내가 몽매한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몽매한 어린아이가 나를 찾는 것이니


일상생활에서 '몽蒙'이 들어간 낱말이 꽤 된다. '계몽주의', '격몽요결', '무지몽매' 등등..


왕필의 주석을 조금 자세히 들어보자.

몽매한 어린이가 와서 나를 찾음은 미혹을 결단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결단해준 것이 한결같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게 되어 다시 미혹되므로 처음 점을 치면 알려주지만 두 번, 세 번을 거듭하면 어지럽히는 것이니 몽매한 어린이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미혹을 없애려는 어린아이에게 미혹을 없애주기는커녕 일관되지 못한 가르침으로 미혹을 오히려 늘리니 두세 번 거듭 가르침을 주면서 스스로 가르침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왕필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에 방점을 찍고 있다. 배워주다가 가르쳐주다를 잡아먹는 문제에 대한 책임은 가르치는 자에게 더 무겁게 부과될 수밖에 없다는 게 왕필의 주장이다.



사라지는 학습동기와 대치동 프로그램


몽매한 어린아이가 나를 찾는 것이지 내가 어린아이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심리상담을 예로 들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가 심리상담가를 방문해서 심리상담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단계를 넘어야 한다. 내 마음이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픈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심리상담가를 방문하기 위해서 예약을 하고 직접 상담소를 방문하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배우는 자가 하는 준비 과정이다. 하지만 내가 찾지도 않았는데 심리상담가가 나에게 연락을 해서 내 심리에 문제가 있거나 마음이 아픈 상태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나라면 전화를 바로 끊거나 미친 사람이라고 욕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배움의 장'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배울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르침을 과잉공급하는 상황이 현실에서는 그렇게 낯선 광경은 아니다.


논어도 가르치지 말아야 할 상황에 대해서 경고한다. 주역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다.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발휘하도록 해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들어 설명할 때 세 귀퉁이를 돌이키지 않으면 다시 일러주지 않는다(술이8)



알려고 바둥거리고 낑낑대지 않는 한 가르쳐주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배움의 가치가 떨어지고, 배움의 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배워준다는 수준으로 몰락하기 때문이다. 왜 배움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아야 할까? 배움도 하나의 에너지이며 생로병사를 겪는 삶이라면 배움의 에너지가 떨어지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배움의 에너지가 떨어지면 배움에 대한 의지도 감각도 축 늘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이 변화하는 모습, 하루, 매 순간에 벌어지는 모습은 모두 배움의 대상이 되지만 배움의 에너지가 바닥이 난다면 나와 상관 없는 일일 뿐이다. 그것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을 지배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원치 않았지만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 우리나라가 이런 식으로 다른 나라에게 자유를 빼앗겼다. 배움의 에너지가 고갈되었는데 변화에 눈을 뜰 수 있을까?


주역과 논어가 공통적으로 주는 메시지는 '학습동기'다. 사교육1번지 대치동은 유명하다. 대치동은 사교육의 성지로서 모든 사교육계가 대치동을 본받고 있다. 대치동의 프로그램은 전국의 사교육계에 복제되고 있다. 공교육이 점점 무너진 자리를 사교육이 대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사교육의 성지인 대치동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 주제이다.


대치동 프로그램이 대한민국을 장악해 가고 있는데, 대치동 프로그램의 핵심은 학습동기 없는 학습이며 공부하는 이유를 없앤 공부다. '배워준다'는 것은 다름 아닌 배울 이유와 배울 동기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동기가 점점 사라지는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던 '배워주다'는 말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