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우연히 서울 갔다가 발견한 그림책의 여운이 무척 깊어서 글로 맺히지 않을 수 없다. 몇년 만의 서울 구경인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그림책 구경을 했다. 그때 문득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그림책 코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볼 수 없는 건 아니었던 카프카 관련 그림책이다.
《카프카와 인형》은 카프카의 말년을 다루고 있어서 귀한 자료다
카프카가 말년을 보낸 한적한 곳에서 우유와 감자를 들고 한 끼 식사 생각에 부풀어올랐을 때 울고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인형을 잃어버려서 울고 있었던 것. 카프카는 체념의 소설가답게 인형을 찾기보다는 인형을 잃어버린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을 인형 전문 배달부라고 소개하고 인형 숩시의 편지를 건네주겠다고 약속한다. 다만 지금은 점심을 먹어야 해서 내일 주겠다고. 이때부터 어린이의 동심을 살리기 위해서 인형 전문 우편배달부 카프카의 마지막 예술혼이 불타오른다.
소설을 쓰거나 소설가 지망생은 알겠지만 소설은 쓰는 것이 아니라 접수하는 것이다. 소설이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소설가는 한 가지 형식에 국한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인형을 잃어버려서 슬픔에 잠긴 한 명의 어린이 독자를 위한 맞춤형 소설을 접수한 셈이다. 독자에 따라서 카프카의 역할도 바뀐다. 카프카의 어린이 사랑은 단편 <국도의 아이들>에도 나왔다시피 어린이의 시선과 생각을 조용히 따라간다. 가오나시처럼 어린이 옆에 가만히 티 안 나게 서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카프카다.
카프카를 사랑하는 나의 입장에서 카프카의 생각을 "접수"해 본다면, 현대인들은 어떤 방향성을 잃었고 각개약진의 봉인에 갇혀 있기 때문에 개미귀신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개미 같다. 어쩌면 남아 있는 길은 시간의 길에서 어린이를 만나는 것이다. 그 어린이가 나의 어린이를 깨워줄 것이다.
어린이에 관한 카프카의 가장 감동적인 문장은 최근 발간된 《카프카의 아포리즘》에 적힌 이 단상이 아닐까 싶다. 이 문장이 내뿜는 알 수 없는 엄청난 위로의 정체를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카프카는 체코의 백석 같은 마음결을 가지고 있어서 더 정이 간다.
어린이가 부서진 책상 위에서 놀다가 부주의해서 넘어진다면 그것은 어린이의 잘못이 아니다. 책상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간만에 카프카 관련 읽을 만한 책을 만났다. 카프카의 일기, 편지 등 미개척지가 매우 많기에 앞으로 카프카 관련 기획 편집 작품은 많이 나올 것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