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묵힌 내 장롱면허증

by 다작이

한창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스무 살에 친구 중 한 녀석이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금방 차를 살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서두르나 싶었다. 게다가 1991년 당시만 해도 감히 스무 살의 나이에 차를 몬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시건방져 보이는 일이었다. 한 이틀 다녀보더니 도저히 혼자 못 다니겠다며 같이 다니자고 했다. 그때만 해도 대구에 지하철이 생기기 전이라 운전 학원까지 가려면 북적이는 버스를 타고 1시간 반 가량 가야 했다.


아마 지금 같으면 그렇게 가라고 하면 결코 못 갈 것이다. 지하철로 가면 30분도 안 되어 도착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10분 정도 걸어가서 그다지 자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거의 시외로 나가는 버스다 보니 배차 간격도 30분이 훌쩍 넘었다. 막상 버스를 타면 대략 1시간 반 정도 타고 내려서 또 15분쯤 걸어 들어가야 운전면허 학원에 도착하게 된다.


전혀 운전에 생각이 없던 나는 마뜩잖다고 했지만 녀석은 연일 날 괴롭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요청에 결국 같이 다니겠다고 했다. 처음 같이 가던 날 정말이지 힘들어 죽을 뻔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먼 길을 어떻게 다녔나 싶을 정도로 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스무 살이 다 가기 전에 기어이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1종 보통. 따지고 보면 그 친구가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때 면허를 안 땄으면 나중에라도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막상 면허는 땄지만 당장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실 그것보다는 형편상 차를 산다는 걸 꿈조차 꿀 수 없다는 게 더 근본적인 이유였다. 만약 그때 내가 차를 살 형편이 되었다고 해도 아마 사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 시대에 대학생에게 차는 그림의 떡이었다. 돈도 못 버는 대학생 주제에 차를 몰고 다니는 걸 좋게 봐주던 시대가 아니다 보니 자연스레 내 운전면허증은 장롱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장 10년을 장롱 속에 처박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건 교직 2년 차이던 때였다. 벽지에 발령받다 보니 대중교통으로 통근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1년 반쯤 카풀을 해 보니 생각보다 너무 불편했다. 결국 면허를 딴 지 10년 만에 운전을 하게 되었다. 처음 운전할 때는 모든 것이 나쁘지 않았다. 우선 가장 좋은 점은 기동력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즉시 갈 수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누군가의 눈치 아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고, 함께 가는 사람의 스케줄에 일일이 내 계획을 맞춰야 할 필요도 없었다. 누군가와의 약속에서 결례를 범하거나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가고 싶은 곳을 못 간 적도 없었다. 내겐 그야말로 새 세상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별 탈 없이 운전을 하던 어느 날 난데없이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면 될까, 하며 심각하게 고민하다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왜 그때 하필이면 책이 떠올랐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어쨌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 동안 손을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어딜 가든 책을 들고 다녔고, 안 읽고 들고 다니기만 하던 시간들이 줄어들면서 어느 정도는 독서가 습관이 되어 갔다. 처음엔 운전과 독서를 병햄했다. 그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많은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읽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로서는 잠을 줄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잠을 줄인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몸이 버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중 문득 운전대를 놓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난 천성적으로 게으른 성격이지만, 일단 한 번 마음먹은 건 무조건 실행에 옮기고 본다. 경우에 따라서는 좋을 수도 혹은 안 좋을 수도 있는 성격이었다. 그때가 운전한 지 대략 11년쯤 되던 해였다. 10년 동안 장롱 속에 있다가 세상에 빛을 본 지 11년 만에 내 면허증은 또다시 장롱 속으로 들어앉게 되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13년째 대중교통으로 통근 중이다. 사실상 지금이 대중교통 통근 역사에 있어 가장 고달프고 힘든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젠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물론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곳에 발령을 받거나 출장을 가게 될 때에는 불편하긴 하다. 또 폭염 혹은 한파일 때에는 몸까지 피곤해지곤 한다. 그래도 난 그동안 단 한 번도 핸들을 잡지 않았다.


운전하지 않는다는 걸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핸들을 놓게 됨으로써 하루 중 없다가 생긴 다섯 시간을 활용할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살다 보면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어떤 것들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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