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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을 맞이하여

114일 차

by 다작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요일 아침이 왔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직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다. 나는 이 시각이 가장 설렌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서다. 사실은 말이 그렇지 특별한 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매일같이 맞이하는 하루는 그저 일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버스를 타면 대략 20분쯤 소요되는데, 어지간히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눈을 붙이지 않으려 애를 쓰곤 한다. 버스에서 잠시 조는 것도 몇 번만 반복되면 금세 습관이 되기 일쑤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단 한 번의 쪽잠으로도 습관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오늘도 여느 때처럼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일단 잠도 거의 다 깬 데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글을 쓰는 것도 꽤 해볼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루를 시작하는 데 있어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 그래 봤자 똑같은 날이 반복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똑같은 시각에 일어나 움직인다. 같은 지하철을 타고 거의 같은 시간에 다시 기차에 오른다. 기차역에 도착하면 지난 금요일과 같은 시각에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 그제야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가 이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런 걸 두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다고 표현할 것이다. 다람쥐는 아니지만, 가끔은 시시포스가 된 듯한 기분에 젖어 하루를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힘을 뺐다가는 바위가 굴러 떨어질 것 같아 잠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다. 언덕 정상을 향하면서 온 신경과 근육에 힘을 주었다 뺐다를 반복한 뒤에 드디어 꼭대기 가까이까지 바위를 밀어 올린다. 열과 성을 다했으니 땀도 물씬 흘렀을 테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잠시 닦고 있으려니 어느새 바위는 다시 언덕 아래로 굴려 내려가 버린다. 내 계산에는 없던 일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향하려고 이미 움직인 바위를 어떻게 해볼 도리는 없다. 잠깐 실의에 빠져 있다가 다시 몸을 추스르고 무거워진 발걸음을 내딛는다.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맨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진 바위가 눈에 점점 크게 들어오기 시작한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에 또 생각을 거듭한다. 어떻게 밀어 올리면 다시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며 고민에 휩싸인다. 아무리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건 알지 못한다. 죽음의 신을 속인 죄로 영원히 반복되는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어리석고 간사한 인간으로선 어떻게 해서든 이번에는 끝을 맺겠지 하는 마음만 다질 뿐이다. 두 종아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잠시 버티었다가 뒷다리를 축으로 의지한 채 바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그의 철학 수필인 『시지프 신화』에서, 형벌을 내린 신에게 시시포스가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형벌을 즐기는 것뿐이라 했다. 그 말은 곧 일상이라는 것이 신을 속인 데 대한 형벌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상은 언제든 굴러내려 갈 수 있는 저 무지막지한 바윗덩어리와 같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침이면 리셋, 즉 매번 제자리에 돌아와 있다. 그러니 우리는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곳까지 밀어 올리고 또 밀어 올려야 한다.


어차피 기껏 밀어 올려 봤자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있으리라는 걸 모를 리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라는 시간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니 별다른 수가 없다. 간혹 실수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며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더러는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깔려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마저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제 밀어 놓았다가 기어이 아래로 굴러 내려가 버린 그 바위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다. 뒷다리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밀어 올려야 한다. 설령 오늘 안에 몇 번이나 바위가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걸 목격하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걸 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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