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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을 가는 마음으로

by 다작이

4분 연착된 무궁화호 열차가 서 있는 승강장에서 50m쯤 뒤에 대경선 승강장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작년 12월에 개통한 이 대경선은 경산에서 구미까지 운행하는 근교 통근용 지하철인 셈이다. 아무리 봐도 코레일이나 대구지하철교통공사 측에서 단단히 오판한 것 같다. 일평균 예상 이용객 수를 훌쩍 넘어서서 왜 두 칸밖에 만들지 않았냐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열 번 타면 한 번 정도 앉아서 갈 수 있을까, 매번 서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지옥철이 아닌 것만 해도 어디겠냐고 생각해 보면 그리 불만을 가질 일도 아닐 테다.


오늘은 다행히 정해진 시간에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열차가 정차하는 동안 유리창 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서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안에 탄 사람보다 승강장에서 승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늘 그랬다. 그래 봤자 23분만 가면 도착하니 아침에 피곤해도 참고 탈 수밖에 없다.


열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몇 명의 사람들이 내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역시 오늘도 빈자리는 없다. 1년 가까이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이용하다 보니 이젠 제법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 중에선 내가 내려야 하는 왜관역에 가기 앞서 하차하는 서대구역에 내릴 사람들도 일고여덟 명쯤 있다. 가끔은 모른 척하고 그들의 앞에 가서 선다. 당신이 다음 역에 내리면 이 자리에 내가 앉겠다는 신호다. 사람의 마음은 매한가지다. 나만 아는 고급 정보일 리가 없다. 이미 타는 순간부터 입석 이용자들은 그들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새로 시작되는 이 하루에 작은 기대를 걸어 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내 인생에 스펙터클한 어떤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단지 아무쪼록 '오늘 하루도 무사히'라는 슬로건을 마음속으로 조용히 떠올릴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차분하게 맞이한 것처럼 저물어가는 저녁도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때로는 바윗덩어리를 산 정상 위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가 되어도 본다. 좋건 싫건 간에 자꾸만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바위를 나는 밀어 올려야 한다.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 앞에 육중한 바위 하나가 놓여 있다, 이걸 움직여야만 길이 생긴다면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기껏 올려놨는데 이내 아래로 굴러 내려가도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그것이 오늘 이 아침에 눈을 뜬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이 아닌가 싶다.


늘 그랬듯 나의 아침은 글쓰기로 시작된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글 같은 거 써서 도대체 뭘 할 거냐고 묻는다. 하나 있는 32년 지기 녀석도 이에 질세라 고리타분한 짓 따위는 그만두고 같이 골프나 치자고 한다. 글쓰기 외에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러고 있냐고 반문하곤 한다. 심지어 가족도 글을 쓴다며 골방에 틀어박혀 있는 를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어떤 이해를 바라지는 않는다. 지금으로선 방해만 안 해도 어디겠나 싶을 뿐이다.


내겐 글쓰기가 시시포스의 바윗덩어리와 같은 게 아닌가 싶다. 머릿속이 늘 복잡한 편이라 가능한 한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저께도 어제도 힘껏 밀어 올렸다면 오늘도 못할 이유는 없다. 글쓰기가 전혀 늘지 않고 늘 제자리만 맴돌아도 상관없다. 바윗덩어리가 없어지진 않더라도 굴리고 또 굴리다 보면 언젠간 닳고 닳아 그 크기가 줄어드는 날이 오진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글을 쓴다.


내겐 집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하는 두 시간 반 동안 완벽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더없이 편한 상태로 글을 쓴다. 고맙게도 어느 누구도 를 방해하지 않는다. 수필을 쓸 때는 나 스스로 인생의 조언자가 되어 갈피를 못 잡는 내게 따끔한 일침을 날리기도 하고, 어느 것 하나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살면서도 소설을 쓸 때는 전지전능한 창조주도 되어 본다. 만약 글을 쓰지 않았다면 어딜 가서 내가 이런 멋진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썩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글이 풀려가듯, 내 앞에 가로놓인 이 하루도 별다른 탈 없이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누군가가 내게 매일 아침마다 열차를 타고 출근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소풍을 가는 것처럼 들뜨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출근길이 어찌 소풍 같을까? 그래도 그런 기분에 취한 척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이 아침이 더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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