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일 차
이른 점심을 먹고 신속하게 설거지를 끝냈다. 늘 11시 15분에 맞춰져 있는 배꼽시계를 감안한다면 그리 이르다고 볼 순 없지만, 토요일 낮의 12시 식사는 아무래도 이른 감이 크다. 나로서는 허기를 누르고 있던 상태였고, 다른 가족에겐 좀 빠르긴 했다. 달랑 세 식구가 먹은 뒤라 설거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부터 소식을 하는 아들과 딸, 그리고 두 사람보다는 많은 양을 먹지만 나 또한 평균치에 비하면 얼마 먹지 않으니 그릇 몇 개, 수저 몇 벌만 씻으면 그만이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 바로 온 집안 청소를 해야 나갈 수 있으니 내 나름으로는 급했다.
막 설거지를 시작하려는데 고맙게도 아들 녀석이 청소는 자기가 할 테니 설거지만 끝내면 나가라고 했다. 아들을 다 키워놓으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며 설거지를 마쳤다. 가방을 챙기고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뭘 빠뜨린 게 없나 싶어 몇 번이나 방 안을 둘러보게 한다. 특히 요즘 들어 증상이 심해졌다. 우스갯소리로 치매 운은하지만, 아직 그럴 나이가 멀었는데도 자꾸만 뭔가를 깜빡하게 된다. 집을 나설 때마다 몇 번이고 호주머니나 가방 안을 살펴보곤 한다. 방금 전에 잊으면 안 된다며 챙겨 넣었다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집을 나서고도 한동안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기억의 오류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 망각 증상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치매 전조 증상인가 싶기도 했다. 너도 그러냐며 친구에게 물었더니, 녀석은 말이 씨가 된다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하긴 아무리 병에는 나이가 따로 있는 건 아니라 해도, 오십 대 중반에 벌써 치매를 들먹이는 건 한참 나간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는 이런 내게 메모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자신도 그렇다고 한다. 그들은 말은 이랬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가까운 어딘가에 적어둬야 하고, 시일을 요하는 일은 잊어버리지 않게 메모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나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게 강조하곤 하는 메모의 힘을 나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아무리 적어둔다고 해도 안 보면 그만이다. 이런 나 역시 한때는 자질구레한 것까지 메모했지만, 적당한 때에 보질 않아서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는 법이다. 살아가면서 기억의 오류로 인해 난처한 상황을 겪지 않으려면 평소에 작은 것 하나라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다.
집에서 나서면 지하철 역까지는 도보로 10분 남짓 걸린다. 집에서 멀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을 겪을 테지만, 가끔은 조금 더 멀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걷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가령, 열 개 남짓한 버스정류장 정도의 거리라면 걷곤 한다. 우선은 운동도 되고,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과 열차를 타려고 승강장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는 일이다. 수백, 수천 명이 지나가지만 당연히 똑같이 생긴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저마다 다른 모습에 다른 차림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이 참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게다가 뭔가 깊이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는 걷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물론 걷는 동안에도 틈틈이 사람들을 관찰한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하며 걸어갈까, 저 두 사람은 뭘 저렇게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며 박장대소할까 생각한다. 간혹 누군가와 언쟁을 벌이듯 큰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듣는 척하면서 그 사람의 말을 엿듣기도 한다. 왜, 싸움은 구경하는 게 재미있다고 하지 않는가? 간혹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사람도 보인다. 나이는 못해도 칠팔십은 되어 보이는데, 옷차림은 영락없는 이십 대다. 내게 작은 용기라도 있었다면 왜 이런 차림으로 다니냐고 물어보고 싶기까지 하다.
어디에선가 아주 짧은 바람이 몰려든다. 한 3초 정도 내 주변을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내가 앉은 바로 아래층에서 열차가 들어오거나 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지금 내가 있는 곳보다는 아래에 있는 승강장이 더 따뜻하고, 그렇게 따지면 열차 안이 가장 따뜻하다. 여차하면 일어서서 몇 걸음만 옮기면 된다. 교통카드를 개찰구에 대고 이 조용한 시간에 종점까지 한 번 갔다 와 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갈 곳이 있다. 그러기에는 이래저래 빠듯할 것 같아 그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다.
문득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기관이 따로 없다. 위아래 옷의 어울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옷을 집어 입고 만 느낌이다.
또 한 번 밑 층에서 바람이 밀려 올라온다. 역사 안으로 막 들어선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개찰구를 통과해서 승강장으로 내려간다. 이번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까? 특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면서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일일이 지켜보고 있다. 만약 누가 이러고 있는 나를 보면 어지간히 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불필요한 시선을 더 받기 전에 슬슬 승강장으로 자리를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