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by 다작이

아내가 평소에 늘 하는 말이 있다.

"난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가고 싶은 곳에 갔으면 해. 보고 싶은 것도 마음껏 보고 말이야."

그건 아내의 지론이기도 했고 일종의 생활신조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아내는 이 철칙을 잘 따르고 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 있다고 소문이 나도 휠체어에 의지해야 이동이 가능하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은 아니다. 평생을 건강하게 살아왔지만, 말년이 되자 관절이 안 좋아 보조장구를 이용해야 움직일 수 있는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내 아내는 관절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런 것도 유전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장모님이 상당히 관절이 좋지 않다. 하마터면 한때는 못 걸을지도 모른다는 진단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기어이 십여 년 전 수술을 받으셨다. 일설에는 관절 수술은 안 받는 게 좋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의사도 아닌 일반인인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수술 후 한동안은 거동에 불편함이 안 보였다. 수술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할 정도였는데, 그런 것도 일종의 내구연한이 있는 건지 몇 년 후엔 다시 통증을 호소하셨다.


그런 장모님의 건강의 특이 사항을 물려받은 건지 아내도 관절이 시원치 않았다. 이제 오십 대 중반을 접어드는 시점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딜 가면 깊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조금 많이 걸었다 싶은 날이 어김없이 무릎 통증을 호소한다. 게다가 더 많이 걸은 날의 다음 날에는 몸져누울 정도로 컨디션도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다. 사정이 그러니 아내는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더 많은 곳에 다녀오기를 원한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나와 함께 가는 게 아니라 어디든 혼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겠다.


어차피 이 부분만큼은 나 역시 일찌감치 미련을 접은 지라 이젠 굳이 따라나서지도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함께 나선 자리에서, 이 나이 먹어 짐짝 취급을 받는다면 그것만큼 모욕적인 일이 어디에 있을까? 편하게 생각하려 한다. 아무리 금슬이 좋아도 죽을 때 같이 가는 건 아니니까. 예전에는 같이 다니려고 무던히 애를 썼었다. 그런데 아내도 그걸 원하지 않는 데다 마치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기라도 한 듯 이제는 혼자 다니는 게 내게도 익숙해지고 말았다.


마흔도 채 되기 전부터 무슨 따로국밥이라도 되는 듯 각자 혼자서 다니는 걸 즐겼으니, 이러는 것도 족히 십오 년은 된 듯하다. 정말 여행을 즐기는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아무 계획 없이, 혼자서 가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아내의 말을 믿고 나 역시 혼자 여행을 가보니 그만큼 편한 것도 없었다. 다리가 아프니 쉬었다 가자며 보채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또 여기 가자 혹은 저기로 가자며 옆에서 누군가가 조르지 않으니 여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혼자 떠나는 여행만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원하는 여행이 되더란 얘기다.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열심히 다녀야 한다는 건 틀림없는 진리다. 타인에게 그 어떤 폐도 끼치지 않고, 자신이 원할 때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여행의 참 묘미가 아닐까? 설령 그 폐를 끼치게 되는 사람이 가족이라 하더라도 전혀 반갑지 않은 이유가 되겠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매일 운동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하루에 한 시간 반 가까이 운동을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주 6회 운동을 하고 있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로 어느 하루를 쉬게 되면 다음 날에 하기 싫어지는 법이라 어지간해선 건너뛰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쉬게 되면 그 주의 공식 휴식일인 일요일에 반드시 운동한다.


운동을 한다는 건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한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포기한 것 못지않게 수확이 있었으면 좋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을은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