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했던 장기재직휴가의 끝이 보인다. 두 번의 주말을 포함해 무려 11일 간이었다. 어딜 가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명분도 그럴싸하다. 한 직장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공로로 주는 휴가인 셈이다.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당당하게 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특별한 휴가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친한 사람들은 이참에 어디 해외라도 가냐며 묻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필이면 지금이 비수기라 비행기 티켓 값이 저렴해 해외로 가기 제격이라고 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나로서는 성수기든 비수기든 하등의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휴가를 며칠 앞둔 어느 날부터인가 직장 동료 중의 몇 분이 내게 어느 나라에 가냐고 했다. 그렇게 묻는 걸로 봐선 그들이 장기재직휴가를 쓰면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의미였다. 또 최소한 이 기간엔 비행기쯤은 타 줘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겐 꿈도 꿀 수 없는 일, 한마디로 그림의 떡일 뿐이다. 어떤 분은 평생에 한 번 쓸 수 있는 휴가이니 계획을 잘 세워 알차게 보내고 오라고 했다. 관심을 갖고 묻는 고마운 이들에게 아들과 함께 며칠 제주도를 다녀 올 계획이라고 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괜스레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죽기 전에 가 보고 싶은 곳이 딱 한 곳이 있긴 하다. 일본. 누가 뭐라고 하건 간에 난 꼭 일본을 가 보고 싶다. 일본은 내게 기회의 땅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꿈의 나라다. 어떤 꿈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글쓰기의 꿈, 그중에서도 특히 소설 쓰기의 꿈을 키우게 한 곳이 바로 일본이다. 내가 멘토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본 출신의 소설가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나라다. 아마 그들의 문학관(기념관)만 둘러봐도 꽤 근사한 여행 코스가 나오지 않겠나 싶다.
게다가 언젠가는 일본어를 꼭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사설이 길었다. 이틀밖에 남지 않은 휴가를 되돌아보며 마지막으로 어딘가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단 하루 만에 잠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왕복 교통비도 꽤 저렴한 곳, 바로 양산 통도사가 떠올랐다.
통도사는 가 보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서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찰이다. 사찰 소개 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삼보 사찰 중의 하나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삼보 사찰은 불교에서 일컫는 세 가지 보물, 즉 불보(부처), 법보(불경), 그리고 승보(승가 즉 승려 공동체)를 모두 갖추고 있는 사찰을 지칭한다. 합천의 해인사(법보 사찰), 순천의 송광사(승보 사찰)와 함께 양산의 통도사는 불보 사찰에 해당한다. 이 불보 사찰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안치된 적멸보궁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위치한 곳이다. 그래서 대개는 양산 통도사라고 알려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등되었다는 것만 봐도 그 가치는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런데 난 필요 이상으로 통도사에 집착한다. 못해도 이삼 년 꼴로 한 번씩은 어떻게 해서든 갔다 오고야 마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다. 바로 내 손으로 직접 쓴 세 번째 장편소설의 주 배경지가 양산 통도사다. 소설을 쓴다는 게 으레 그렇듯, 우연히 알게 된 통도사 창건 설화를 눈여겨 읽던 중에 대략적인 스토리가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솔직히 그랬다. 별 것도 아닌 내용이었지만, 적어도 난 꽤 거창하게 그 소설을 썼다. 수준이 어떤지 혹은 작품성이 있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내가 구상한 내용으로 썼다는 게 의미 있을 뿐이다.
늘 그랬듯 오늘도 통도사에 도착하면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닐 것이다. 세상에는 없으나 유일하게 내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스토리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길 테다. 괜히 나 혼자 들뜨고 취해 이곳에서는 주인공이 어떤 인물을 만났고, 저기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짚어 볼 것이다. 이미 완결된 작품이지만, 운이 따른다면 더 그럴싸하게 수정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통도사를 다녀온 저녁에 그 소설을 꺼내 들고 읽는 호사를 누리게 되지 않을까?
10분 뒤면 어느새 울산(통도사) KTX역에 도착한다. 오늘 하루 다리는 혹사하겠지만, 그래도 내겐 더없이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