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에서

96일 차

by 다작이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대략 10여 년 전쯤 해인사에 갔던 일이 있었다. 대웅전에 가깝게 다가가던 순간 스님의 독경 소리가 들렸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청아하고 낭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뭐랄까, 그 목소리는 가던 발걸음을 붙들어 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온 사찰 경내에 울려 퍼지던 목탁 소리는 스님의 음성과 너무 잘 어울렸다.

'역시 큰 절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오늘 온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3대 사찰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생각했다. 뜻도 모르는 독경 소리에 한창 취해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도대체 누구지? 정말 몰상식한 사람이군. 이런 곳에서 매너 모드 필수인 거 모르나?"

그때 독경을 하던 스님이 목탁을 내려놓았다. 이내 왼쪽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정말 듣기 좋은 소리가 느닷없이 멈춰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때 스님이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여보세요!"

"독경 중에 스님이 폰을 받다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스님은 사람 아이가?"

옆에 있던 아내가 뭐 그런 걸로 호들갑을 떠느냐며 스님은 사람이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때 상당한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일견 아내의 말에 틀린 데는 없으나, 스님은 일반적인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었기에 더 놀랐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절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으니 어느 절을 가든 난, 그때의 일이 생각난다. 맞다. 스님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동화된 건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어떤 것도 이해 못 할 일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통도사 경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꽤 큰 절은 분명하나, 막상 돌아다녀 보면 그리 크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우선 내가 올 때마다 가장 먼저 들르는 구룡지부터 찾았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작은 연못이다. 자장 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에 이 연못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의 용 중 여덟 마리는 퇴치하고 연못의 일부를 메운 뒤에 한 마리만 남겨 이 사찰을 지키게 했다는 창건설화의 바탕이 된 연못이다. 바로 이 구룡지가 내게 한 편의 장편소설을 선물해 주었다.


한 차례 둘러보면서 사찰도 예전의 사찰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산속에 틀어박힌 절, 그것이 바로 내가 기억하는 사찰일 텐데 그건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심지어 사찰로 들어가기 전 좌우로 빼곡히 들어찬 모텔들, 맛집, 그리고 커피 매장 등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흔히 말하는 꽤 오래전에 입적하신 큰스님들이 보시면 통탄할 일이 아니겠나 싶었다. 게다가 식당가 뒤편에 마련된 문화거리는 말만 그랬지 그 끝에도 모텔이 들어서 있었다.


사찰 내 어디를 가도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양미는 물론이고 양초도 돈을 줘야 살 수 있고, 심지어 등(燈)도 무상이 아니었다. 시쳇말로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라지만 종교라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게 씁쓸하기만 할 뿐이었다.


1차 통도사 순례를 마쳤을 무렵 배가 고팠다. 아침도 거르고 나왔으니 충분히 그럴 법했다. 점심을 먹으려면 30분은 걸어가야 한다. 길이 워낙 좋은 데다 공기까지 맑으니 못할 것도 없다. 일단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와야겠다며 내려오다 어떤 안내문을 보고 하마터면 기겁할 뻔했다.


개산대제 꽃공양 받습니다.

1만 원


역시 이곳에도 돈이었다.

'맞아. 사찰도 예전에 내가 알던 그 사찰이 아니야.'

짐짓 큰소리쳐놓고 발길을 돌리는데, 자꾸만 뭔가가 내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았다.

'1만 원이라잖아!'

마침 수능이 며칠 남지 않은 딸아이가 생각났다. 데스크에 앉은 분에게 다가가니 네임펜과 명함 크기의 빳빳한 종이를 건넨다. 이왕 하기로 했으니 누구의 눈치를 볼 일도 없다.


병술생 대구 이**

고득점 수능 대박을 기원합니다!


담당자가 마음에 드는 화분의 아무 데나 꽂으면 된다고 했다. 이렇게 뻔뻔한 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돈에 물든 사찰이라며 실컷 흉을 봐 놓고는 여 봐란 듯 대웅전 앞의 큰 화분 속에 꽂아 두고는 돌아선다.


과연 부처님이 이런 속물 같은 내 소원도 들어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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