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일 차
아직 밖은 어두웠다. 환하게 밝으려면 족히 반 시간 정도는 지나야 한다. 어둠은 그렇다 치더라도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겨울의 모습은 충분히 알 만했다. 창가에 서니 같은 방 안인데도 느껴지는 기운이 확연히 달랐다. 마치 실내는 여름, 밖은 겨울이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꽉 닫힌 창문 틈새로 바람이 들이치는 기분이 들었다. 밖에 나가보기도 전에 어느 정도 추울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늘 내 방 바깥 베란다에 내어놓은 외출복을 들여오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창문 하나를 경계로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여름엔 더운 게 정상이듯 겨울에 추운 건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며칠 새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출근 준비를 하려고 욕실에 들렀더니 그곳 역시 또 다른 세상이었다. 전체적으로 기온도 낮고 다른 곳에 비해 습했다. 편하게 반팔 차림으로 있다가 들어가니 나도 모르게 한기가 느껴졌다. 거울에 금세 습기가 가득 차 앞이 보이질 않았다. 면도를 해야 하니 물 묻은 손으로 거울을 문질러 본다. 손 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집 안이 이 정도인데 밖은 어떨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시야가 트이면서 밤 사이 초췌해진 몰골이 눈에 들어온다.
'아,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생겼구나.'
필부필부, 만약 내가 아닌 타인이었다면 내 첫 인상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참 특징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로 말하자면 '행인 1' 혹은 '행인 2' 같은 존재였다. 막 잠에서 깬 상태라 그런지 눈에 초점이 없었다. 피부 상태 따위를 신경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거울 속에 비친 푸석푸석한 초로의 중년남자가 내내 눈에 와 박힌다. 아직 세면하기 전이라 그럴 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이런 모습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게 못내 서글펐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소리가 요란했다. 아직도 아들 방에서 울어대는 알람 소리보다 크면 컸지 작은 수준이 아니었다. 물 소리에 온 가족이 기척을 내는 것 같았다. 가끔 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한답시고 수돗물을 틀어놓으면 자는 사람 생각하지 않는다던 아내의 핀잔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30분은 더 잘 수 있는 나머지 가족을 위해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약간 아래로 내렸다.
대충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옷을 입고 나기기만 하면 된다. 사실 추위는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몇 벌이라도 껴입어야 하고, 더 두꺼운 외투를 걸치는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주머니에 핫팩 정도 넣어다니는 게 전부다. 물론 나는 그런 건 넣어다니지 않는다. 아무튼 중무장을 한 채로 드디어 집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날씨가 상당했다. 그곳이 어디건 간에 얼른 실내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 시간 반쯤 걸리는 통근길, 길어봤자 이삼십 분 정도만 밖에서 대기하면 금세 차량 안에서 몸을 녹일 수 있다.
그리 풍족하게 사는 형편은 아니라고 해도 이만한 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혹한을 피할 수 있는 집이 있어서 저녁이면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밥 때가 되면 제대로 차려진 음식들을 먹을 수 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배를 곯고 다니는 것만큼 추위에 취약한 일은 없으리라. 게다가 유명 브랜드의 옷은 아니더라도 따뜻하게 차려 입고 다닐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타고난 복이 작다는 말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구역에 갈 때면 노숙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곤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주 보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의 형편이 나아져 어딘가에서 새로운 삶을 꾸렸는지, 아니면 인간에게 밀려나 어딘가로 떠나버린 동물처럼 발전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보였던 이들이 더는 보이지 않으니 기분이 묘했다. 늘 그들을 보면서 그래도 난 비교적 잘 살아가고 있다는 위안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내 나이 또래의 노숙인을 볼 때면 마음이 더 쓰라렸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겠나 싶었다.
누군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다. 그 말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지만, 확실한 건 날씨가 추우니까 겨울이라는 것이다. 겨울엔 추운 게 정상이다. 이 추운 겨울을 나고 한 달 남짓 될까 말까 하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이 추위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야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