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입고 나가면 오늘은 많이 추울 텐데 괜찮겠어?"
아침에 집을 나서는 내게 아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매일 일기예보를 챙겨보는 아내, 날씨에 대해선 단 한 번의 오류도 없는 사람임을 간과하고 만 셈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날씨 같은 건 괘념치 않고 다니는 성격이다. 제 까짓 게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어,라는 게 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왔을 때 오늘처럼 추우면 아내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며 후회 아닌 후회를 하게 된다.
사실 큰소리를 칠 만했다. 일단은 어제 입었던 것과 같이 꽤 튼튼하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아래위로 내의를 입었고, 아래에는 기모가 든 바지도 입었다. 그것만 해도 웬만한 추위는 면할 수 있었다. 솔직히 사람들이 봤을 때 추위에 떨고 있는 것만큼 불쌍해 보이는 건 없다. 다소 둔해 보여도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목을 덮는 니트 옷을 걸치고 나서 그 위에 3년 전의 제자가 손수 짜 준 목도리까지 둘렀다. 아무리 칼바람이 분다고 해도 패딩 속까지 들이밀 수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했던 건 확실히 오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지하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는 그 순간부터 심상치 않았다. 운동을 가던 어젯밤에 느꼈던 그 정도의 날씨가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은 메인 출입문이 닫힌 공간이었다. 안이 이 정도라면 바깥은 보나 마나가 아니겠나 싶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동안 추위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 같았다. 바깥과 안을 구분하는 마지막 문을 통과하자마자 '억'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마치 반팔 차림으로 실내에 편하게 있다가 베란다를 가로막고 선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발을 들이민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추운 줄 알았다면 옷을 더 두껍게 입는 건데.'
아내가 옆에 있었다면 무심코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는 듯한 아내의 표정이 순간 떠올랐다.
이미 밖으로 나온 이상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제대로 준비하고 나오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이미 나온 이상은 별다른 방법이 없다. 호된 추위를 오늘 하루는 겪어 봐야 내일은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터였다.
대구역 대합실에 도착했다. 대경선이 들어오려면 아직 이십여 분의 여유가 있었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TV 앞에 섰다. 마침 기상캐스터가 날씨를 보도하고 있었다. 칠곡과 팔공산 일대가 영하 12도였다. 숫자가 주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그제야 이 아침이 왜 이렇게 추운지 이해가 갔다. 한창 날씨를 보도하고 있는 와중에 아래에는 내내 자막이 떠 있었다.
'올 들어 가장 추워'
간밤에 아내도 아마 저 자막을 본 모양이었다. 역시 아내의 말은 그저 근거 없이 던진 말이 아니었다.
살면서 가끔은 아내가 아내가 아니라 엄마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막상 이렇게 말하고 보니 뭔가가 이상하다 싶지만, 사실이 그런 건 할 수 없다. 나만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닌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엄마가 더 필요해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건 아니다. 나만을 사랑하고 나만을 생각하는 여인이 필요해서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렇게 만난 여인이 어느새 내 엄마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내의 이런저런 훈계를 달가워할 만한 사람은 없다. 마치 앵무새가 의미 없는 말을 따라 하듯 늘 똑같은 소리를 반복해 대는 그 모습이 어찌 좋아 보이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눈칫밥만 느는 것 같다. 아무리 애정을 담아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잔소리에 깔려 있는 애정의 정도를 귀신 같이 알아차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누라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은 확실히 부인하지 못할 것 같다. 아침에 나를 보자마자 던졌던 그 한 마디를 듣고 옷을 더 껴입었다면 이 칼바람에 덜덜 떨 일은 없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