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로맨틱 가도 여행 : 뷔르츠부르크
여행할 기분이 아닐 때가 있다. 뷔르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날이 그랬다. 온다는 우리 캐리어 두 개는 결국 오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참으로 막막한 시점이었다. 몸과 맘이 축 처진 그대로 방에 박혀 아무 생각 안 나게 드라마나 실컷 보고 싶었다.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한 아침이었다.
멍하니 창문 밖을 봤다. 이 와중에 날이 참 좋았다. 그게 좀 얄미웠다. 차라리 비나 오지 싶었다. 비 핑계대고 꼼짝없이 우울해할 수나 있게. 비가 온다면 축 처진 기분 맘껏 느끼며 침대에 붙어있어도 덜 아까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침으로 좋아하는(한국에서는 비싸서 잘 못 먹는) 체리를 먹고, 창밖으로 예쁜 볕이 초록 잎을 연둣빛으로 물들이는 걸 보니 문득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을 움직이는 게 하는 데는 맛있는 것과 맑은 날이면 충분했다. 써놓고 보니 그리 간단한 것들은 아니구나 싶다. 여하튼 그 와중에 좋은 날 덕분에 마지막 뷔르츠부르크 산책을 나섰다.
집 문 밖을 나서니 한없이 구겨져 있던 기분이 조금씩 피어났다.
알테마인교(Alte Mainbrücke)
뷔르츠부르크에서 가장 애정했던 알테마인교에서 한동안의 시간을 보냈다. 예성이가 사진을 열심히 찍어줬다. 어느새 울적한 맘은 증발하고 재밌게 놀고 있었다.
레지덴츠(Residenz) 궁전과 정원
레지덴츠 궁전의 정원이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향했다. 막상 도착한 공원의 겉모습은 기대보다 수수하고 단조로웠다. 하지만 궁전 반대편으로 돌아서자마자 그림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초코송이 모양의 나무들과 여러 색의 꽃들이 조화롭게 피어난 꽃밭을 보자마자 홀딱 반했다. 마당 있는 집에 로망이 있는 나는 예성이에게 ‘우리 집 꽃밭도 이렇게 만드는 거야!’며 신나서 외쳤다. 궁전 정원 클래스의 꽃밭을 우리 집 마당에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를 예성이는 애써 외면했다. 참 현실적인 사람과 결혼했다.
궁전 곁에 있을 때 어느 방에선가 피아노 연습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 덕에 궁전 안 모습은 어떨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유료라길래 꾹 참았다. 시선을 정원으로 돌리니 아쉬운 맘은 금세 사라졌다. 그만큼 예쁜 정원이었다.
아직 여행 비수기 시즌이었을 때라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관광객이냐 아니냐는 우리처럼 카메라나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열심히 찍냐 안 찍냐로 구분했다.
곳곳에는 정원을 즐기러 온 시민들이 있었다. 햇볕을 즐기러 온 사람, 그늘과 솔바람을 즐기러 온 사람, 느릿한 박자의 시간 속에서 독서를 즐기러 온 사람, 낮잠을 즐기러 온 사람, 간단한 점심 도시락을 즐기는 사람, 수다를 즐기러 온 사람 등 즐기러 온 사람들만 머무르고 있는 장소라 좋았다. 그 안에 있으니 우리도 즐거워졌다.
“나오길 잘했다. 그치?”
“응, 너무.”
즐기려는 노력을 한다는 건 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즐김의 노력을 지속하고 싶었다.
Café Wunschlos glücklich
뷔르츠부르크 산책을 어느 정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카페를 갔다. 에어비앤비 호스트 카린이 추천해 준 곳이었다. 정성이 깃든 공간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기에 여행지에서도 카페에 가는 걸 유명 관광지 가는 것보다 좋아한다. 하지만 유럽은 비싼 물가에 팁까지 줘야 하므로 카페에 자주 가는 것은 포기했었다. 그래도 이 날 만큼은 큰 맘먹고 카페에 가 샌드위치를 먹었다. 맛있게 다 먹고 뭐 때문인지 기억도 안 나는 이유로 예성이와 투닥거렸는데, 화해까지 다 하고 일어났다. 환상의 마무리였다.
분명 꼼짝도 못 할 것 같은 몸과 맘으로 시작한 하루였다. 하지만 날 좋은 날 덕에 기분 좋은 산책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에 볕 좋은 날을 얄미워했던 거 취소다. 날이 좋아 참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