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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 Dec 29. 2023

10p 10.5p 그리고 9p

내 인생에도 복선이 있었다.

과거에 내가 한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번주는 과거의 나를 찾아가 한 번쯤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이런 경고의 말이라도 날려야 마음이 조금 편할까 싶다. 책을 만들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닌 2년. 이제야 그 결실을 보려 하는데, 글만 쓰던 사람이 디자인까지 다 할 거라는 건 욕심이었는지 예상과 다른 일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건 못생긴 결과물이었다.


하나하나 직접 정하고 만든 자식 같은 결과물을 두고 못생겼다고 말하는 게 웃기지만 정말 못생겼다. 표지가 아니라 내지가 못생겨서 놀랬다. 책은 읽는 건데 이래선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도 없다 생각했다. 이렇게 식겁한 마음을 달래준 건 아직 인쇄를 맡기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보기 싫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뜯어봤다. 왜 못생겼을까?


눈에 확 들어오는 문제는 글꼴이었다. 글꼴이 너무 컸다. 독립출판물과 단행본에 흔히 쓰인다는 사륙판에 20mm 보통의 여백을 둬놓고 10.5p라는 보통의 글씨 크기가 아니라 11p를 사용한 게 잘못이었나 보다. 보통과 보편, 평균을 따르다가 0.5p의 자유를 줬더니 문제가 생겼다. 문제를 아니까 수정하면 되지. 마음을 다잡은 나에게 2 연타를 날린 건 10.5p로 수정했지만 못생긴 결과물이었다. 뭐가 문제일까.


그제야 내 머릿속에 있는 독립출판물이 어떤 모습인지 책장을 뒤졌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 그렇게 작지도 크지도 않은 글자 크기와 불편함 없는 행간.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으며 결국 내 손에 딱 들어온 책은 '(첫 책이 나오는 그 언젠가) 다시 꺼내 읽을 글'을 쓰게 만든 책이었다. 이 글이 내 인생의 복선이었을까. 2주 전의 내가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쉽다.


하나하나 뜯어본다. 내가 원하는 판형이 이렇게 작으니 글꼴도 훨씬 작아야겠네. 행간은 조금 더 띄워도 되겠어. 모범답안을 찾아서 다행이다.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만들면 이 비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저 밑까지 떨어진 의욕을 다시금 북돋아 본다. 해야지. 해내야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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