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갔다 오면 집이 풍족해진다. 제사 같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야 내려간다는 점에 그렇기도 하고 시골에 있는 큰집에서 여러 작물을 챙겨주기에 그렇기도 하다. 올해는 동생이 내려갔을 때 마늘 한 포대기, 내가 내려갔을 때 또 마늘 한 포대기를 챙겨 주셔서 총 두 포대기의 마늘이 우리 집에 생겼다. 마늘의 민족답게 요리마다 다진 마늘, 편 마늘, 통마늘 등 다양하게 많이 쓰긴 하지만 우리가 받아온 마늘은 껍질도 벗기지 않은 말 그대로 통마늘이었고 그걸 사용하려면 우선 까는 게 먼저였다.
마늘을 쓰려면 손질해야 하는 게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건 그 양이다. 두 포대기 가득 찬 마늘은 손댈 용기도 나지 않을 정도의 양이었다. 그렇게 못 본 척 미루고 미루다 날이 추워지고 이대로 가다간 마늘에 싹이 나서 쓸 수 없다는 지금이 되어서야 마늘 손질을 시작하였다. 사실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은 아니다. 부엌에 껍질이 다 까진 마늘이 한 소쿠리 가득 있길래 드디어 시작되었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버지께 물으니 잘 벗겨지게 하루 동안 물에 불려서 본인이 까셨다고 말했다. 집에 없었기에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안되었고 그 당시에는 그랫냐, 다음에는 돕겠다는 말뿐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있었던 오전, 끼익 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후에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려 나가 보니 문 앞 계단에 앉아 불려진 마늘을 까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후에 일이 있어 마음은 바빴지만 그 모습을 보고 지나칠 수 없는 건 너무 당연했다. 그전까지 아버지는 혼자 한 포대를 다 손질하시고 깐 마늘로 두 소쿠리를 가득 채우셨었다. 조용히 아버지 앞에 의자를 놓고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딸내미가 앉아서 일손을 돕자 조금 신이 난 듯했다. 보리에게 "마늘 까야한다니까 다 도망갔드만 오늘은 작은 누나가 있네. 둘이 하니까 30분이면 다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큰누나는 어디갔노. 마늘 까기 싫어서 도망갔나 보다. 보리야 큰누나 데리고 온나."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마늘 빙산의 일부분
물에 불려진 마늘을 손질하다 보니 손톱에는 흙이 끼고 구부정한 자세 때문에 허리가 아파왔다. 마늘은 줄지 않고 단순 작업에 지루해질 때쯤 아버지랑 보리가 얼마나 귀엽고 똑똑한지, 요즘 내가 뭐하는지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채워나갔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몸이 굳고 손끝이 시려갈 쯤이 돼서야 바닥을 봤다. 그리고 데자뷔처럼 똑같은 작업을 하루 더 한 후에야 마늘 2포대의 끝을 볼 수 있었다. 손가락에 잔뜩 베인 마늘 냄새는 덤이었다.
마늘과의 전쟁은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총 네 소쿠리의 마늘을 다져서 다진 마늘을 만들든, 장아찌를 담그든 뭐든 해야 했다. 아니면 고생해서 깐 마늘에 싹이나 쓸 수 없게 된단다. 손가락에 마늘 냄새가 베일 때까지 깠는데 못 쓰게 되면 너무 억울하겠다 싶어서 몽땅 다 쓰고 만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시간이 없었다. 깐 마늘이 네 소쿠리 가득인데, 거실을 들어설 때부터 그 냄새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데 시간이 없다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찾아낸 시간이 대전에서 하는 결혼식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였다. 아침 8시 반에 집을 나가 거의 12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저녁 8시쯤 집에 오니 솔직히 하고 싶지 않았다. 씻고 쉬고 자고 싶었는데 그러면 저 마늘이 저대로 방치될 게 뻔해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시작했다. 하려는 요리는 다진 마늘, 마늘장아찌 그리고 꿀마늘 절임 이렇게 세 가지였다. 요리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간단한 조리였기에 얼른 하고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먼저, 커다란 유리병을 소독하면서 꿀마늘 절임을 위해 마늘을 찌고, 그 사이에 장아찌 양념을 준비한다. 장아찌 레시피가 마늘 1kg 기준이어서 한 소쿠리의 마늘 무게를 쟀더니 대략 1.1kg이다. 1kg면 유리병 하나에 다 들어가겠지? 대강 생각하며 양념을 개량한다. 대용량 조리는 해본 적이 없어서 '대충' 생각해도 기가 쏙쏙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 사이 소독을 마친 유리병을 식혀두고 다른 유리병을 다시 소독한다. 10분 간 찐 마늘은 선풍기 바람에 말려두고 빈 화구에 준비한 장아찌 양념을 끓인다. 마지막으로 믹서기에 마늘을 갈 준비를 한다.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에 어지러워질 때쯤 커다란 유리병 두 개를 채웠는데 식탁 위에는 마늘이 두 바가지나 남아있었다. 그제야 계산이 된다. 1kg가 넘는 소쿠리가 4개. 마늘이 4.5킬로나 됐구나...
왼쪽엔 마늘, 오른쪽에는 설거지거리. 바로 앞에는 잘 갈리지도 않는 마늘들. 한숨을 뱉어도 사라지지 않는 답답함이 커졌다. 시작할 때의 정신력은 바닥났고 피곤함과 조급함이 뒤섞여 화가 됐다. 마늘한테 화가 났다가, 마늘을 받아온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가, 이렇게 힘든데 도와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화가 났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마늘과 간장 투성이인 설거지를 하는데 화난 마음이 서러움으로 이어졌다. 목 밑에서 울컥울컥 파도가 쳤다. 결국 아버지를 호출했다. "아빠, 나 더 이상 못하겠어." 도망치듯 방으로 왔다. 울컥거리는 마음을 둘 곳이 없어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서없이 꺼낸 이야기에 고생했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마늘 때문에 이럴 일인가 싶은데도 눈물이 나기 시작하니까 멈추지 않았다.
울면서 이래서 서럽고, 저래서 화났다고 말하다 보니 어느새 파도가 잠잠해졌다. 높은 파도에 가려졌던 부끄러움이 스윽 고개를 내밀었다. 마늘 때문이라니. 어이없고 민망했다. 가만히 들어줘서 고마운 만큼 덜컥 울어버린 게 미안했다. 고맙고 미안하고 창피하다는 말까지 다 전하고 통화를 끊으니 15분이 지나있었다. 엄청난 소용돌이라고 생각했는데 15분 만에 끝나서 더 부끄러웠다. 거기에 고생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비싼 초콜릿인데 하며 주섬주섬 초콜릿을 건네주는 동생 덕분에 파도쳤던 마음에 해까지 떴다. 피곤하고 지쳤던 만큼 금세 위로받았다. "고생했다."는 한마디가 이렇게 달구나 느꼈고, 나는 참 단순한 사람이구나 알게 되었다. 그리고 뭘 하든 체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