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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Apr 22. 2017

아는 사람만 아는 너릿재 옛길? 꽃길! 별유풍경別有風景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화순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너릿재 터널이 있다.

너릿재 터널은 하나만이 아니라 비슷한 지역에 두 개가 시공되어 있다.

좁고 어두운 너릿재 구 터널은 1971년에 준공되었고, 두 개의 터널에 각각 한 방향으로 차선이 나 있는 너릿재 신 터널은 1992년에 준공되었다. 그만큼 광주광역시와 화순의 교류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나는 구 너릿재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세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대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광주 시내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7명의 친구들과 함께 화순 적벽으로 놀러 가며 지나친 구 너릿재 터널에 대한 기억이다.

지금처럼 기어도 없고 두 개의 바퀴와 하나의 체인만 있는 자전거를 타고, 젊은 힘 하나만 믿고 광주에서 너릿재 터널까지 경사진 오르막 길을 쉬지 않고 올랐던 기억이다. 힘들게 오른 정상에는 터널이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 인양 큰 문을 열어재끼고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친구들의 거친 호흡소리를 귀에 담으며 어둑어둑한 터널을 지났을 때 눈앞에 펼쳐진 밝고 환한 하늘과 발아래 산과 들이 정겹게 어우러진 별유풍경(別有風景)은 지금 눈을 감지 않고도 선하게 떠올릴 수 있다.

두 번째 또 하나의 기억, 젊은 사람이면 이유 불문하고 때리고 짓밟으며 잡아가던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 시절에 광주시내에서 시외로는 전화가 안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광주 밖으로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대학교 4학년으로 피가 끓던 나는 겁이 없었다. 서울로 전화를 걸기 위해 무작정 화순 전화국으로 향했다. 시내버스마저 끊겨서 광주 집에서 화순까지 걸어갔다. 소태동을 지나자 큰길이 막혀 있어서 논밭 둑길을 따라 너릿재 터널로 향했다. 너릿재 터널로 오르는 양 편 산기슭에는 군인들이 참호 속에서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때서야 무서움이 들었다. 어머니께 나갔다 온다고 말이라도 하고 올 걸, 후회가 되었다. 이대로 내가 잡혀가거나 죽으면, 집에만 가만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아들이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졌으니 영문도 모르고 나를 찾아 헤매실 것을 생각하니 두렵고 떨렸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일은 저질렀는 걸. 앞서가는 아저씨를 따라 너릿재 터널로 들어서는 데 그때 본 터널은 악마의 입구 같았다. 사람을 잡아먹는 악마가 그 큰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추억은 아버지와 연관된 것이다. 요즘처럼 봄날, 화순으로 나들이 가는 길에 부모님과 우리 부부, 그리고 아들이 너릿재 터널을 지나 터널 공원에 잠시 주차를 하고 쉬던 때였다. 아버지께서 손으로 좁은 숲길을 가리키며 “저 길이 광주와 화순을 오가던 옛길이란다.”라고 하셨다. 나는 순간적으로 ‘저 좁은 길로 시외버스가 다녔다고?’ 의심이 들었다. 너무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셔서 우리 곁에 안 계신 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나는 가끔 너릿재 구 터널 길을 운전해 터널 공원(현재는 너릿재 체육 쉼터로 변경됨)을 찾아간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던 옛길을 따라 걸으며 이 길을 따라 걸었을 아버지를 생각한다.

지금이야 너릿재 옛길이라 하여 다듬고 가꾸어서 넓고 걷기에도 편한 길이 되었지만, 아버지께서 오가셨을 시절에는 좁아터진 길에 버스마저 매캐한 먼지를 날리며 털털거리고 지나다녔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새댁이던 시절 ‘이른 아침에 시댁을 방문하러 꽃단장을 하고 나섰는데 시어머니가 계신 시골에 도착하고 나면 머리카락이 허옇게 변해있었다.’는 말씀에서 시골버스를 생각해 낸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느리기도 하고, 걷기에 다리도 아프셨을 테고, 먼지는 뒤집어써야 하고…….

그러다 문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왜 걸어 다니셨을까?’ 아버지께서는 집에서 소학교까지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다녔다고 하셨다. 교통편이 귀하기도 했거니와 돈도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그런데 꼭 그 이유만일까?

낭만이 넘치시던 아버지께서는 “너릿재 길은 꽃길이었어야.”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좁고 구불구불한 불편함만 보는 좁은 내 시각을 넓혀주시는 말씀이셨다.

4월 초, 4km에 이르는 너릿재 옛길에는 아름드리 벚나무 600여 그루가 벚꽃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가족과 함께 너릿재 벚꽃 축제 행사에 갔었다. ‘그럼 그렇지, 축제장의 혼잡함은 어디나 똑같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함께 간 아내의 기분이 상할까 봐서 “와 사람 정말 많네, 피어있는 벚꽃보다 많은 것 같네.”라고 했다.

2주일 뒤, 늦은 오후에 다시 찾은 너릿재 옛길은 지난 늦가을처럼 고즈넉해 좋았다.

사람이 드물어서 혼자 사색하며 걸으니 좋았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말씀이 옳으시다는 것을 알았다. “너릿재 길은 꽃길이어야…….”

너릿재 옛 길가에는 아직 지지 않은 벚꽃과 편백나무와 소나무들이 빼곡히 서서 따가운 햇살 아래로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개나리, 복사꽃, 진달래, 벚꽃, 목련처럼 키 큰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개나리>

<복사꽃>

<진달래>

<벚꽃과 목련>

<목련>


그러나 발목보다 더 낮은 곳에서 사람들이 봐주지 않아도 전혀 기죽지 않고 피어있는 들꽃 - 민들레, 돌양지 꽃, 고깔제비꽃, 냉이꽃, 자주괴불주머니, 자운영꽃, 애기똥풀, 꽃 따지 꽃은 얼마나 소담스럽고 예쁜지! 이름마저 정겹지 않은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던 아버지의 눈에는 이런 들꽃들이 더 아름답고 귀하게 보였으리라 짐작해본다.

너릿재 옛길을 가거든, 발아래 작고 앙증맞게 피어있는 꽃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작아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꽃단장을 한 들꽃들에 눈을 맞추어 보면 들꽃 한 송이에서 그 옛날 새색시 시절의 어머니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민들레>

<돌양지 꽃>

<고깔제비꽃>

<냉이꽃>

<자주괴불주머니 꽃>

<자운영꽃>

<애기똥풀>

<꽃따지 꽃>


다음은 너릿재란 이름에 관한 사연이다. 1757년에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서 너릿재의 옛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판치(板峙)’라는 이름이 바로 그것으로, 널빤지 판(板) 자와 언덕 치(峙) 자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깊고 험한 너릿재를 넘던 사람들이 산적이나 도둑들에게 죽임을 당해 판, 즉 널에 실려 너릿너릿 내려온다고 해서 너릿재라 불렀다고 한다.

<동구청에서 설치한 청사초롱이 줄지어 핀 꽃과 같은 곳을 지나면 '햇살이 산속으로'라는 시비가 서 있다. 연인들에게는 의미를 더 하는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가 된 연리지 나무도 볼 수 있다.>

고갯마루에는 크고 널따란 바위에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사람의 제목이 ‘광주 읍루(光州邑樓)’라는 오언율시가 새겨져 있다.

『광산(光山)은 형세 뛰어나 아름다운 곳

옛날을 생각하는 듯 유연하여라

부(府)라 일컬은 건 어느 때였을까

광주로 승격된 그 해를 묻노라

산천은 빼어나 한도(一道)에 웅장하고

풍성한 민물속에 어진이가 많아라

서쪽 마루 끝이 넓음을 깨닫고

높은 누(樓)에 올라 짧은 글로 칭송하노라』

너릿재 체육 쉼터 뒤에는 소아르 갤러리가 있는데 이 또한 볼만하다.

소아르[SOAR]는 Space Of Art Research의 약자이다. ‘높이 솟아오르다, 언덕 위에서 날아오르다’라는 의미이다. 복합 문화 공간인 소아르 갤러리는 2012년 5월 개관 전을 시작으로 40세 미만의 젊은 작가들의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야외에 전시된 조각품들이 내 눈길을 한참이나 끌며,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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