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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Jun 06. 2017

광주읍성! 우리 곁으로 다시 되돌아 올 수는 없는가?

<제목의 이미지 출처 : http://gjeupseong.org>

무등산 아래 서석평야(瑞石平野)에 빛고을 광주(光州)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은 삼국시대 백제 때 노지(奴只), 무진주(武珍州), 신라 경덕왕 때 무주(武州)라 불리다가 고려 태조23년(AD 940년)에 최초로 광주(光州)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후로도 해양(海陽), 익주(翼州), 화평부(化平府) 등 다양한 이름으로 지칭 된 후에야 광주로 자리매김을 했다.

많은 사람들의 오랜 삶터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곳에는 지명과 함께 성(城)이 있기 마련이다. 광주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호남평야의 중심이자 내륙에서 영산강을 따라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광주읍성(光州邑城)이 있었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광주읍성은 고려 우왕 시대인 1378년~1379년, 지금으로부터 660여 년 전에 현재의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와 금남로 일대를 중심으로 성이 건축되었다. 성 밖에는 성을 따라 해자(垓字, 도랑)를 파서 성의 방어에 사용하였다.

성 안에 사는 주민들은 외부침입으로부터 안전을 위해 성이 필요했고, 성 또한 주민의 손길이 필요했다. 인간의 손으로 지어 진 모든 것들은 지어진 순간, 자연 풍파와 사람의 손길에 의해 길들여지고, 훼손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읍성 안에서 희로애락의 삶을 구가했고, 읍성 또한 사람들과 함께 부침을 겪으며 모진풍파를 이겨내고 500년을 넘게 버텼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견뎌 온 광주읍성은 그러나 사람들의 끝없는 욕심과 짧은 안목으로 이해 불과 100여 년 전에 우리 앞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2017년, 광주에는 광주읍성이 있는가? 일부 구간 재현해 놓은 곳이 있기는 하나 옛 그대로 실존하는 광주읍성은 없다. 광주읍성이 없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이버 공간(http://www.gjeupseong.org)에만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광주읍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 광주읍성이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광주의 중심에 오각형 형태로 자리하면서 광주의 중심을 지켜내던 광주읍성의 흔적을 내가 찾아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광주 읍성 길을 따라 걸어보니,

읍성은 몰라도 서울의 숭례문(崇禮門)이나 나주읍성의 남고문(南顧門)처럼 광주에도 성문이라도 하나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다. 광주읍성을 기억하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작은 표지석 하나 없는 곳도 있었다.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아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 아쉬웠다. 과거의 역사가 켜켜이 쌓아 올려 진 위에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집을 그림으로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려 내려온다. 그러나  사람이 실제 살아가는 집은 바닥부터 지어 올라간다. 허상을 배제하고 실질을 쫒을 때 우리는 바닥부터, 과거로부터 시작한다. 바닥이 단단해야 지진에도, 태풍에도 견디는 튼튼한 집이 완성된다. 우리 광주의 옛 흔적을 지워 없애버리고 미래만 바라보며 사는 우리는 허상만을 쫒는 것은 아닐는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의 역사 문헌에 따르면 돌로 쌓아진 광주읍성은 약 2,262m(972보, 8,253척)의 둘레에, 4.2m(9척)의 높이였으며 성문이 4개 있었다. 성을 쌓을 때 쓰인 돌들은 40~60cm 크기의 자연석이었고 일부만 다듬어진 돌이 사용되었다. 오각형 성의 둘레를 따라 동서남북의 위치에 있던 4 개 성문은 각각 동쪽에 서원문(瑞元門), 서쪽에 광리문(光利門), 남쪽에 진남문(鎭南門), 북쪽에 공북문(拱北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남쪽에 자리 잡은 진남문(鎭南門)은 현재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자리에 있었다. 진남문 앞에서 학동 전남대병원 쪽으로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남문의 이름이 진남문인 이유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남쪽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남문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다만 이를 대신하려는 듯 2006년 ~ 2007년에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을 지으면서 발굴된 성 돌들을 별도로 보관해 놓았다가 2014년 5월에 광주읍성의 일부를 재현 복원해 놓은 성의 일부와 광주읍성 유허표지판을 근처에서 볼 수 있다.

북쪽에 자리 잡은 공북문(拱北門)은 현재의 충장 치안센터(충장로 64, 충장로 3가) 사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충장 치안센터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는 광주 폴리 중 하나인 99칸(피터 아이젠만이 만든 철제 조형물)이 성문의 모양을 대신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공북문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횡단보도 옆 보도 위에 서 있기도 하다. 공북문은 네 개의 성문 중 가장 중요했다. 우선 공북문이라는 이름이 북쪽 한양의 군왕에 충성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공북(拱北)이라는 단어 자체가 모든 별이 북극성으로 향하는 것과 같이 사방의 백성들이 천자(天子)의 덕(德化)에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실제 북문 밖으로 공북루와 유림 숲을 지나 비아 장을 거쳐 장성을 통과해 한양 도성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북문을 통해 목사와 현감 등이 새로 부임하거나 관리들의 행차가 이어졌다. 공북문과 진남문을 이어주던 길은 광주를 대표하는 충장로로 변했다. 공북문 밖으로는 유림(버드나무 숲)이 있었고 그 끝에는 공북루가 있었다.            

동쪽에 자리 잡은 서원문(瑞元門)은 현재의 제봉로에 인접한 전남여고 구 후문에 위치해 있었다. 전남여고에서 제봉로를 건너는 횡단보도에 서원문 제등이 서 있어서 광주 동부경찰서에서 전남여구 구 후문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은 서원문터 조형물 아래를 통과해 걸어가게 된다. 서원(瑞元)의 뜻은 동쪽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으라는 뜻이다. 서원문 앞에는 한 쌍의 장승이 서 있었다. 이 장승은 ‘동문 밖 장승’이라는 이름으로 전남대학교 박물관 앞으로 이전되어 있다.     

서쪽에 자리 잡은 광리문(光利門)은 황금동 구 미국공보관 사거리, 더 정확하게는 구 콜 박스라 불리는 곳에 있었다. 광리문이 있던 황금동 콜 박스 사거리 중심 바닥에는 광주읍성의 모양과 읍성 내 도로가 황동으로 새겨진 ‘기억의 현재화’라는 작품이 있다. 도로에 새겨진 광주읍성의 모양을 보면 오각형인 것을 알 수 있다. 읍성의 윤곽을 따라 4개의 성문이 이름과 함께 표시되어 있고, 읍성 외곽의 공북루도 황동 표지판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리문(光利門)은 만사형통을 바라는 의미와 광주, 광산(光山)의 서쪽 문이란 뜻을 갖는다. 광주 동구 광산동(光山洞)은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과 구 시청 사거리에 걸쳐 있다. 광리문을 지나 성 밖으로 나서면 광주천이 나오는데 광주천변에는 작은 장이 있었다. 작은 장 옆으로 흐르는 광주천에는 섬이 있었다. 현재 시내를 관통하는 광주천의 모습은 광주천 직선화공사 후의 모습이라 큰 굽이도 없고 섬도 없다. 그러나 사실 광주천은 지금보다 더 넓었고, 굽이져 있었다. 작은 장 옆 광주천에 있는 섬에서 좀 더 무등산 쪽으로 가면 또 하나의 섬이 있었는데 이 물길 위에는 수재를 막기 위해 지었던 석서정(石犀亭)이 있었다. 석서정은 현재 광주 공원 앞 광주대교 근처에 재 건립 되어 있다.                

조선시대 광주읍성 주변에는 남쪽에 대황사(현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 동쪽에 백천사(현 지산동 백천사터 동오층석탑(보물 110호)), 북쪽에 십신사(현 임동 구 농업고등하교 자리), 서쪽에 성거사(현 구동 광주공원 서오층석탑(보물 제109호))가 있었다. 대황사(大皇寺)는 광주읍성 안에 있었다.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 구 전남도청 정문 앞으로 가면 재명석등과 석탑 지붕돌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재명석등(在銘石燈)은 194cm 높이의 석탑으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재명석등은 땅 위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꽃모양의 하대석을 놓았으며, 팔각기둥의 간주석(竿柱石)을 그 위에 세운다. 간주석 위에 상대석이 놓이고, 상대석 위에는 4개의 화창(火窓)이 뚫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놓여 있다. 화사석 위에 다시 옥개석과 보주가 올려져 있는 형태다. 광주읍성 중심에는 객관이 있었고, 정청인 동헌과 수령의 숙소인 내아, 훈련청, 장교청, 활을 쏘던 관덕정 등이 있었다.







광주 읍성의 밖에 있던 향교와 서오층석탑, 동오층석탑은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고려 우왕 때 광주천변에 세워져 홍수를 다스리던 석서정은 양림동쪽 광주천 한 가운데 석축으로 쌓은 원래있던 장소에서 자리를 옮겨 현재의 광주공원 앞으로 옮겨져 있다. 1914년 광주에서 큰 부자였던 양파 정낙교선생이 석서정을 그리워하며 세운 양파정은 현재 사직공원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양파정내에는 명사들의 시를 담은 편액이 30여개 있다. 절양루라고도 불리는 공북루는 원래 있던 자리 근처인 광주제일고등학교 옆자리에 작은 모양으로 재현되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절양루라는 이름은 절양류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문으로 버들류(柳)가 머무를 류(留)와 음이 같아서 남는 사람이 떠나는 사람에게 버들가지를 꺽어서 전해주며 이별을 아쉬어하고 내 곁에 더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던 것이다. 공북루는 고향인 광주를 떠나는 이들이들이 광주읍성을 벗어나 외지로 향할 때 주로 이용했던 공북문을 이용했으며, 공북문을 벗어나 버드나무 숲(유림수柳林藪)으로 이어진 공북루에 이르면 버드나무를 꺽어 이별의 슬픔을 달랬던 자리에 있었기에 절양루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광주읍성의 성벽은 일제 통감부가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하고 각령 제1호로 지시된 '성벽처리위원회규정'에 의해 철거되기 시작했다. 1910년 1월 23일 황성신문에서는 "광주군의 성벽과 문루를 뜯어낸 토목 재를 사용하겠다고 도 관찰사가 내부에 청원하여 인가를 받았다."라고 나와 있다.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서 살며 광주를 사랑했던 조상들의 얼이 스민 광주읍성과 옛 건물들이 희생되고 없어진 대가로 광주의 경제가 발전되어 사람들이 부자가 됐을지는 몰라도, 경제가 발전한 만큼 마음도 부자가 되었는지 묻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이제라도 사회 이곳저곳에서 광주의 근현대사를 인식하고 기념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나서는 것은 가난한 마음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광주읍성을 추억하는 이들이 많아져서 광주읍성의 옛 모습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공간에 어떤 형태로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 오기를 기대해본다. 광주를 처음 찾는 사람에게는 광주의 옛 모습을 알 수 있게 하고, 광주에서 살아 온 사람들에게는 광주의 옛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어린시절과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를 추억해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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