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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Oct 23. 2017

서창들녘 억새의 꿈

2017 서구민 문예 백일장 ㅡ 우수상 글

올해도 어김없이 서창들녘엔 억새가 지천으로 피었다.

억새는 누군가가 심고 거름을 주며 보살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자라고 하얗게 핀다. 만추(晩秋)의 어느 날 스치듯 지나가는 실바람에 의지해 잠시 하늘을 날다 내려앉은 땅에 머리를 처박은 씨앗이 움트고 싹을 키우고 기둥을 뻗어 하늘을 향해 자란다. 자신의 터전이 척박한 땅이라고 탓을 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지켜 서지 않는 허허로운 벌판에 달빛보다 더 하얀 억새꽃이 무늬를 그리며 일렁일 수 있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며 자신이 할 도리를 한 억새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온 여름, 비가 드물어 강렬한 햇볕만 뜨겁게 대지를 달굴 때도 상관하지 않았고, 폭우가 쏟아져도 상관하지 않으며 그저 자라기에만 전념을 하였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벌레를 키워내고, 새의 둥지가 되었다. 낙엽마저 지고 쓸쓸할 빈 들녘을 무리지어 지키던 억새는 베어지고도 사람을 돕는다. 억새풀로 이어진 지붕 아래서 편히 자고 먹고 쉰 농부는 억새 여물로 힘을 얻는 소와 함께 서창들녘 논에서 초발매기, 재벌매기, 만드리로 논과 밭을 풍요롭게 한다. 결국 억새는 사람을 살찌우고 키워낸다. 억척스럽게 살아내는 억새의 삶이 부모님의 삶과 다름이 아니다. 어쩌면 부모님이 억새에게서 배운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억새가 부모님 사는 모습을 보고 배운 것일 수도 있다.   

  

서창들녘을 촉촉이 축이며 흐르는 물과 억새를 보니 젊으셨던 부모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 같다. 나 어릴 적 부모님께서는 억세고 부지런하셨다. 부모님 이름 석 자로 된 땅 한 평 갖지 못하셨으나,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셨고, 밤이 깊도록 잠자리에 드시지 못하였다. 그리 노력하셨어도 우리 내 삶은 궁핍하기만 하였다. 그래도 어린자식들은 부모님의 땀과 눈물을 먹으며 굶주리지 않고 튼튼한 억새처럼 자랄 수 있었다. 지금은 발 하나 담그기에도 겁나게 광주천이 오염되었지만, 부모님 젊으셨을 때 광주천은 빨래터가 되기도 하고, 김장철 배추를 씻는 물이 되기도 할 만큼 깨끗하였다. 어머니께서는 광주천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던 나를 찾아와 “규석아 밥 먹어라”부르셨다.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의 어린 내게 잡혀 고무신 안에서 꼬물거리던 어린 물고기를 보신 아버지께서는, “허허 우리 아들이 메기를 잡았네, 어쩌다 너에게 잡혔을 꺼나?”하시며 어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아서 들어 올려 주셨다. “오늘 하루 밤만 메기랑 같이 놀고, 내일은 냇가에 가서 다시 풀어주고 오너라. 엄마 메기가 보고 싶어 하지 않겠니?”하시며 펌프 물을 퍼 올려 가득 담은 세숫대야에 메기를 넣어두셨다. 메기는 좁은 고무신을 벗어난 것이 행복한 듯 헤엄을 치며 뱅뱅 세숫대야 둘레를 돌았다.     


어린 아들이 자라서, 대학생이 되고 군대를 다녀왔다. 아들이 자란만큼 부모님은 늙어가셨다. 다 자란 아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 부모님께서도 나를 이렇게 키우셨겠구나.’하고 깨달을 때쯤 부모님의 머리는 하늘의 하얀 구름보다 더 하얀 억새풀처럼 하얗게 단풍이 들어계셨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커다란 나무 같으셨던 부모님께서는 작은 바람에도 몸을 흔들며 ‘서걱서걱’ 노래하는 억새처럼 약해지셨다. 늦은 봄,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시던 어머님께서는 해당화가 피던 날 붉은 해당화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나셨고, 그해 늦은 가을날 아버지께서는 억새꽃 하얀 씨앗으로 바람에 날리듯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지금 부모님께서는 하늘가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실까? ‘쏴아~’ 불어오는 바람에 억새가 눕는다. 서창 들녘을 가득 메우고 하얗게 핀 억새꽃을 보니, 억새보다 더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부모님이 사무치게 그립다. 어릴 적 부모님 손잡고 가는 곳이 어디든 따라 걸으며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오늘 밤 꿈속에서라도 부모님 손잡고 억새풀 샛길을 따라 걷고 싶다. 해당화 닮아 빨간 코스모스도 우리 부모님을 반겨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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