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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Dec 02. 2021

농성광장, 가을의 화양연화(花樣年華)

광주 서구 대남대로와 상무대로가 교차하는 길목에 있는 농성광장. 광장은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도록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넓은 빈터다. 농성광장은 여의도광장처럼 아스팔트로 포장되거나 5.18 민주광장처럼 보도블록이 놓여 있지 않고, 많은 나무와 잔디가 있어 여유로운 공간이다. 광장이라기보다는 공원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 농성광장 공원에는 시민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정자와 의자가 있다.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두 개의 대로가 교차할 만큼 큰 도로변에 있지만, 소음을 차단해 주는 나무 덕분에 즈넉함느낀다.

쉬지 않는 시간에 이끌려 세월은 어느덧 가을 끝자락에 이르렀다. 하지만 농성광장 공원 나무들은 여전히 가을을 머금고 있다. 앞만 보고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쳐 나는 도시에서, 넉넉한 공간에 많은 풀과 무들이 숨 쉰다. 계절 앞에서 나무는 늦장을 부린다. 더러는 나뭇잎 다 떨구고 검은 회색 빈 가지를 드러내 놓은 나무도 있지만, 제법 많은 나무들이 지난겨울부터 숨겨온 영혼의 빛을 마침내 가을에 드러낸 색동옷 차림이다. 심지어 어떤 무는 아직 푸르기까지 하다.

붉고 노랗게 물든 나무를 보면서 나는 몇 년 전 TV를 통해 다시 보았던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 떠 올랐다.  영화가 생각난 탓인지 'In The Mood For Love' 음악이 귓가에 흐른다. 묵직한 저음의 첼로와 가녀린 선율의 바이올린 연주가 탱고 리듬으로 구슬프게 흐른다. 노랫말 없는 음악을 파람으로 따라 부른다. 바이올린이 고 올라 고음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휘파람 바람으로 흩어진다.  음울한 골목길을 벗어난 주인공 양조위와 장만옥이 벤치에 앉다. 낙엽이 두 사람 어깨와 벤치 위 차분해진다. 나무를 붉고 노랗게 치장 단풍잎이 장만옥의 치파오 같다. 영화 속에서 장만옥은 치파오를 스물한 벌이나 입고 나왔었다. 장만옥보다 더 많은 치파오로 치장한 나무의 자태가 고혹적이다.

화양연화엔 냇 킹 콜(Nat King Cole)이 스페인어로 부른 'Aquellos Ojos Verdes', 'Te Quiero Dijiste', 'Quizas Quizas Quizas'라는 노래 곡이 더 등장한다. 저음의 냇 킹 콜 노래는 달지 않은 우유사탕처럼 스위트하다. 낙엽을 밟으며 거닐어 본다. 발 끝에  밟히는 나뭇잎이 사그락 거리며 지난여름 이야기를 들려준다. '잎이 풍성한 여름철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화양연화인 줄 알고 있겠지만, 가을을 지내 보면 가을이 바로 화양연화의 시기라는 걸  알게 될 거야'라 말한다. '인생에서 활기차고 뭐든 두려울 게 없는 젊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도, 인생의 쓴맛, 단맛, 매운맛을 다 본 후, 맛에 무덤덤해지는 가을 같은 중년이 오히려 한창때이며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화양연화'라고 속살거린다.

나뭇잎이 숲 속 길을 비워두고 있다. 왜 비워둔 걸까? 어쩌면 낙엽은 사람들에게 '각자 자신의 길을 가!'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제 각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첸 부인’과 ‘차우’처럼...

가을이 가고 나면, 나는 겨울의 길을 가야 한다. 내가 가야 할 겨울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인공 차우 첸 부인에게 "이제 알겠어요.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라고 했던 말처럼, 내 남은 인생에 나도 모르게 시작되었다가 나도 모르게 끝나는 일은 무얼까?

영화의 첫 자막을 떠 올린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한 걸음 더 내딛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화려한 단풍에 수줍어 고개 숙였더니 내 곁을 무심히 떠나가는 가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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