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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케 Oct 12. 2020

아빠를 아빠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을 때

아빠라는 사람을 비로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호구조사 느낌 나는 질문 절대 하지 마.”
“걱정 마.”

“대화 루즈해진다 싶으면 혁이가 센스 있게 뭔 말이든 꺼내 주고.”
“아 알았어.”

“다들 오늘 진짜 실수하기만 해 봐.”
“아 그만해! 알았다고!”


남자 친구를 처음으로 가족에게 소개해 주던 날이었어요. 만나러 가는 길 내내 가족들에게 잔소리를 했어요. 제가 보이는 모습에 집착하는 피곤한 스타일이긴 해요.


완벽하게 화목한 가족 사이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나!를 남친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혹시라도 가족들이 실수할까 봐 안달복달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저, 내심 그 오빠하고 결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가면까진 아니지만....


뭐 저희 가족이 원래는 불행(?)한 데 거짓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요. 드라마처럼 알콩달콩 사랑 넘치는 집이 아니었을 뿐. 그냥 적당히 화목하고 적당히 평범해요.


음.. 그 정도 있잖아요. 엄마, 아빠는 잘 지내는 것 같으시면서도 꽤 자주 싸우시고. 자식에게 할 수 있는 건 해 주시지만 (학원 보내주기 O) 못 해주는 건 못 해주시는 (미국 교환학생 보내주기 X) 정도. “아빠, 나 예뻐?” 물으면, ’우리 딸이 제일 예쁘다’는 딸바보는 아니지만 "글쎄.. 그래도 확실히 귀염상이야."라고 해 주시는 적당히 객관적인 아빠. (실제로 예쁜 건 아닌데 귀염상이긴 합니다. 정말임.)


더 솔직히 말하면 아빠가 너무 걱정되는 거예요. 아빠들 집에서 방귀만 북북 뀌고 그러잖아요. 다른 가족들이 뭐 얘기할 때에도 제대로 안 듣고 딴 얘기 하고. 아빠 하고 싶은 얘기만 하고!


제 남자 친구를 만나서도 아빠가 너무 편하게 행동하거나, 남친에게 부담이 되는 질문을 할까 봐 혼자 긴장 최고조였어요.


진짜 제발 아무도 실수하지 마


막상 그 상황은 큰 문제없이 잘 지나갔어요. 엄마는 따스하게 제 남친을 맞이해 주셨고, 동생은 형님을 깍듯하게 모셨어요. 제가 너무 과한 걱정을 했더라고요.


특히, 저희 아빠가 그렇게 젠틀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정말 처음 알았어요. 다 같이 얘기할 수 있는 스몰 토크 딱딱 던져주고. 남친 일상에 대해서도 자상히 물어봐 주시고. 대화를 주도하셨다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집에 오는 길에 가족들한테 그랬던 게 기억나요.


“나 우리 아빠 이런 사람인 줄 진짜 몰랐네.”


지나서 돌이켜보면, 아빠도 직장생활을 제가 산 인생의 길이만큼이나 해 오신 분이거든요. 그 정도 자리에 미숙하고 긴장하실 리 없었어요. 제가 집에서의 모습만 생각하고 아빠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거죠.


저도 밖에서의 모습과 가족에게의 모습이 다르듯, 아빠도 그럴 뿐이었던 건데 말이에요. (저때 저 유치했던 거 이젠 너무 잘 알아요. 이젠 조금 철 들었답니다. 엄마아빠 미안해....)


저는요. 아빠는 아빠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빠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란 걸 몰랐어요. 아빠는 아빠이기에 항상 특별하고, 완벽하고, 능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짜증이 났어요.


아빠를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기에, 오히려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가족인 제가 아빠를 가장 몰랐던 것 같기도 해요.


아빠는 돈 번다고 이걸 30년을 하신 분인데


이제 아빠는 정년퇴직을 하셨고, 취미로 주말농장을 하고 계세요. 아무래도 30년 넘게 다닌 직장을 마무리하셨으니 마음이 많이 싱숭생숭하시겠죠. 저번엔 아빠 주말농장에 같이 가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빠가 대뜸 이러시더라고요.


“다혜야. 넌 아빠가 앞으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냐?”


아빠의 주말농장에서


아빠는 이제 첫째 딸에게 약해진 마음을 슬쩍 열어버린 순간. 딱 그 순간에, 아빠도 그냥 인간이라는 사실을 갑자기 실감했어요. 아빠도 퇴직 후에 불안하구나. 아빠도 방황하는구나.


사실 아빠가 저에게 심리적으로 기대려 하신 거잖아요. 장녀들이 제일 싫어하는 마음 의존. 근데 이상한 건 오히려 그 이후에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내 아빠가 완벽한 아빠가 아니란 걸 받아들이고, 평범한 인간이자 어떤 의미로는 내 친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거든요. 성격이 특이한 구석도 있고, 실수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하는,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하는 나이 많은 친구라고요.


친구끼리는 조언도 막 하고, 듣기 싫은 건 그만 얘기하라고도 하고, 너무 귀찮게 굴면 살짝 거리를 유지하기도 하고 하잖아요. 저 아빠한테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근데 아빠를 아빠로 바라보지 않으니, 사이가 더 좋아졌어요. 아빠가 속마음도 더 많이 얘기하시고요. 저도 아빠의 그런 하소연에 스트레스를 덜 받아요. 아빠와의 관계에 작은 열쇠를 찾은 느낌이랄까요.


가끔 애정표현도 하게 됐답니다

근데 또 아시죠? 아빠와 제 관계가 언제 어떻게 바뀔진 또 몰라요. 다만, 그런 상황이 온다면 또 새로운 열쇠를 찾아보려고요. 포기 안 할래요.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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