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ㅡ맛

글-맛:소년이 온다(한강)

2014.05.19 / (주)창비

by grim jari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여태껏 한강 작가 책을 한 번도 읽지 못했다.

'채식주의자'를 영화로 먼저 만난 탓이었을까.

평소 즐겨보는 티브이 프로에서 스쳐가듯 '소년이 온다' 책 이야기를 들었다. 5.18 광주사태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점이 귀에 확 꽂혔고 그래? 그럼 읽어봐야지- 싶은 마음이 확 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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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p17


표지의 안개꽃과 제목이 지칭하는 그 소년이- 복합적인 감정과 함께 천천히 스며든다.

나라가 그들을 죽이고, 관위에 태극기를 펴는 것.

과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 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p85


산 사람에겐 아직 삶이 남아있다. 그것이 배고픔, 살과 뼈를 만들고 길을 걷게 만든다. 하지만 왜- 삶의 의무와 죄책감의 공존 속에 치욕을 느끼는 건 민주 항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어야 할까.


그런 감정의 감옥 속에 갇혀야 할 인간들은 따로 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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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 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 주겠다.
-p119


후반부로 갈수록 읽기 힘들 정도의 고문 장면이 묘사된다.

알고 있었고, 익히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상상조차 힘든 모습이다.

절로 눈이 질끈 감기고, 양쪽 팔에 소름이 끼친다. 국가의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처참하게 만드는지 확인된다.

나라면, 나라면 어땠을까.

견딜 수 있었을까, 계속할 수 있었을까.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p135


앞장서 민주화를 외쳤던 이들은 대부분 죽었고, 살아남았다 해도 늘 죽음을 생각한다.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라는 작심하고 읽으면 3,4시간 만에 완독 할 수 있는 스토리다. 한강 작가의 글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알 수 있었고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경위와 이유가 맨 뒤에 나와있어 이해가 더 잘 된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어선 안 되는 일들이 있더라. 지금 내가 이 삶을 살게끔 밑바탕을 다져준 그들에게 모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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