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08.05 / (주)창비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아이를 지운 뒤 담담히 말했다. 전세로 옮기면 우리 예쁜 아이 낳아 부족한 것 없이 키우자. 난 얼굴도 모르는 우리 애보다 당신이랑 내 삶이 더 중요해. 그는 울면서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해 나를 때렸다. 나는 맘껏 그를 원망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남들 하는 건 다 하려 한다고 소리 질렀다. 울고 욕하고 소리 지르면서도 나는, 그의 폭력을 이해했다. 그가 나를 때리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그를 때렸을 것이다.
-p51
애인을 사귀기 전에는, 진짜 이 여자애가 날 사랑해 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할 것 같았다. 근데 사실, 그것을 이루면 행복하겠지 하고 상상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꿈을 이루는 것보다 꿈을 품는 게 더 행복했다는 말이다.
-p133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야 하고, 할 수 없어도 하겠다고 해야 하며,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하고, 내 방식과 기분이 아니라 조직의 그것을 따라야만 하는 게 이 사회의 도덕이자 상식이다.
-p78
산 너머엔 내가 사는 마을과 똑같은 마을이 있을 것이고, 그 너머엔 또 그런 곳이 있을 것이었다.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된다는 건, 가파른 산을 넘어 모든 것이 똑같지만 이름만 다른 마을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p98
낙엽이 지고 서리가 내리던 어느 밤, 오빠는 오랜만에 팽이를 돌렸다. 나는 오빠 곁에 가만히 앉아 오빠와 나 말고는 아무도 누울 수 없는 좁은 방의 무게를 느꼈다. 우리가 허락된 크기만큼 자라는 동안 무너지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우리의 숨과 비밀과 유년을 덧바르며 거듭 견고해진 방. 까만 그곳에서, 야광 팽이가 팽팽 돌고 있었다.
-p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