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ㅡ맛

글-맛:팽이 1,2(최진영)

1986.08.05 / (주)창비

by grim jari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믿고 보는 최애 작가 최진영이지만, 86년에 출간한 이 책은 최근작과는 꽤 다른 느낌의 글이었다.

수록된 단편 중, '팽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아이를 지운 뒤 담담히 말했다. 전세로 옮기면 우리 예쁜 아이 낳아 부족한 것 없이 키우자. 난 얼굴도 모르는 우리 애보다 당신이랑 내 삶이 더 중요해. 그는 울면서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해 나를 때렸다. 나는 맘껏 그를 원망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남들 하는 건 다 하려 한다고 소리 질렀다. 울고 욕하고 소리 지르면서도 나는, 그의 폭력을 이해했다. 그가 나를 때리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그를 때렸을 것이다.
-p51


가슴 아픈 문장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상처를 공유하며 겪어내는 방법이 폭력이고, 무방비로 당하며 이해한다는 것.. 차마 상상도 되지 않지만, 어디선가는 현실로 재생되고 있을 것 같았다.


애인을 사귀기 전에는, 진짜 이 여자애가 날 사랑해 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할 것 같았다. 근데 사실, 그것을 이루면 행복하겠지 하고 상상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꿈을 이루는 것보다 꿈을 품는 게 더 행복했다는 말이다.
-p133


'꿈'이 주는 몽글함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품으면 행복해서 누구에게나 있었으면 하고, 꿈을 가지라고 권하게 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야 하고, 할 수 없어도 하겠다고 해야 하며,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하고, 내 방식과 기분이 아니라 조직의 그것을 따라야만 하는 게 이 사회의 도덕이자 상식이다.
-p78


조직은 왜 이 모양일까.

어째서 통제가 사회의 도덕이 됐는지 모르겠다.

하긴, 과연 사회만 그럴까 싶기도.


산 너머엔 내가 사는 마을과 똑같은 마을이 있을 것이고, 그 너머엔 또 그런 곳이 있을 것이었다.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된다는 건, 가파른 산을 넘어 모든 것이 똑같지만 이름만 다른 마을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p98


학생 때 학교의 명칭이 달라질 때나, 나이 숫자의 앞 단위가 바뀔 때도 모든 건 똑같은데 환경만 달라진다고 느꼈다.

그 모호하지만 당연한듯한 느낌은 작가의 '다른 마을로 들어선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낙엽이 지고 서리가 내리던 어느 밤, 오빠는 오랜만에 팽이를 돌렸다. 나는 오빠 곁에 가만히 앉아 오빠와 나 말고는 아무도 누울 수 없는 좁은 방의 무게를 느꼈다. 우리가 허락된 크기만큼 자라는 동안 무너지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우리의 숨과 비밀과 유년을 덧바르며 거듭 견고해진 방. 까만 그곳에서, 야광 팽이가 팽팽 돌고 있었다.
-p143


'팽이'가 책 2의 맨 마지막에 수록돼 있는데, 개인적으론 제일 기억에 남고 재밌었다. 최진영 작가의 느낌이 제일 진한 글이라, 내용이 영상처럼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얇은 두께의 단편작 '팽이 1,2'는 작가의 다양한 세계관을 볼 수 있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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