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ㅡ맛

글-맛:돌봄과 작업

2021.05.20 / 돌고래

by grim jari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이 책은 비슷한 시기의 육아 중인 친구가 보내줬다.

받자마자 읽었는데 공감되는 내용에 위로가 됐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던 책이다.



나는 글을 쓰는 내내 주변의 일 욕심 많고 책임감 넘치는 여성 동료들을 떠올렸다. 그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썼다. "당신이 태어나 자라면서 가정과 사회에서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충분히 수용받았다면, 당신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권리감 있는 인간들이 되었을 거라고. 그렇게 해서 열심 끝에 마주하는 결말이 번아웃이 아니라 창조적인 삶이 되었을 거라고."
-p23


권리감 있는 인간과 창조적인 삶은 연결되는구나.

성을 떠나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이가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들 열심히 꾸역꾸역 하루를 견뎌내는 것일까.

새벽 2시쯤, 분유를 먹고 잠든 아이의 트림을 시키고자 등을 두드리며 식탁에 앉아 책을 펴던 내 모습이 뿌옇게 떠오른다.


인류는 이런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갖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절대로 말하지 않으면서. 진실이 밝혀지면 제정신을 가진 사람 중에 누가 아이를 가지려고 하겠는가? 나는 덫에 걸린 것 같았다. 보이스피싱 같은 것에 낚여 나도 모르게 무시무시한 물건을 주문해 버린 것 같았다. 20년 할부로.
-p40


덫 까진 아니라도, 판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느낌은 든다.

출산만 하면, 100일만 지나면, 돌만 지나면, 유치원에만 들어가면, 내 삶에 다시 루틴이 돌아올 줄 알았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주인공은 순식간에 바뀐다. 덫은 제거할 수 있고, 물건이라면 반품할 수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아예 다른 판에서 벌이는 행위 같달까.



소위 독박 육아의 고통이란 신체적 차원의 고됨뿐 아니라 이 모든 갈등과 어려움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아이를 돌보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쌓이고 아이라는 낯선 존재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 양육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지고 돌봄의 분배는 조금 더 정의로워질 것이다.
-p112


나는 임신 기간 동안 일기를 거의 쓰지 않았지만, 몇몇 남은 기록을 들춰보아도 대부분이 나의 심리적인 모순을 담고 있다. 기쁘지만 두려운, 행복하지만 불행한 임신의 양가성은 그대로 육아로도 이어진다.
-p124


내 몸 안에서 자라고 태어난 아이가, 낯설다고 느껴질 때 드는 두려움과 고민이 양육을 무겁게 만드는 이유이고- 그런 혼란 속에도 아이가 몇 초 배시시 웃어주거나, 잠시 곤히 자주면 제법 기쁘기도 해서 돌봄의 양가성은 엄마의 감정을 잡고 흔든다.

출산 전엔 타인과 함께 하고 고민한다는 것이 다소 귀찮음을 유발했으나, 육아는 손이 많아지면 질수록 불안이 감소되는 듯하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돌봄과 일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찾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도달 불가능한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더 진한 농도의 정성으로 아이를 돌보고 싶은 일상적인 충동을 억누르며 폭발적인 집중력으로 일하는 법을 깨쳐간다. 걸핏하면 불쑥 고개를 들어 나를 좀먹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법도 조금씩 배워간다,
-p146


내 상황에 대해 정확하고 가감 없이 이야기하기, 나 자신의 야심과 한계를 재평가하기, 실수하는 자신을 인정하기, 그렇게 타협도 하고 쌈박질도 하고 흥분도 하고, 화해도 두루두루 다 하면서 지내기.
-p147


모든 것에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나'인 걸 인정하는 순간, 서툰 육아의 시간도 흘려보낼 수 있더라. 힘들다는 말만 해도 제법 감정이 해소되기도 하고, 시간이 약이라는 흔한 위로에 동조하며 타협도 한다.

책 속의 11명의 작가가 육아(돌봄)와 작업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눈물겹기도 했다. 부제가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인데, 잃고 싶지 않은 '나'가 뭔지 다시 짚어보게 돼서 엄마가 아닌 여성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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