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078
잠에서 깨어보니 먼저 일어난 토사가 아주 느릿하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침대 위에서 다채로운 동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본인이 인도로 돌아온 이유가 리시케시(Rishikesh)에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토사는 그의 요가 마스터(Master)를 다시 찾아가 배움을 더하고 싶다고 한다.
숨쉬기도 어려울 것 같은 동작들을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하나 둘 보여준 토사는
어느새 침대 끝에 앉아서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이 녀석, 참 말릴 수 없는 히피인걸!
가만히 따라 앉아서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 건너온 게 아니라, 태국에서, 그것도 빠이(Pai)에서 한참을 지내다 오는 길이란다.
빠이에서 수공예품을 팔며 지내는 젊은 한국인 아가씨가 있었던 걸 어렴풋이 기억했는데
그녀가 바로 토사의 여자친구란다.
토사도 나도 웃었다.
여행자의 세계란!
도시의 아침을 보고 싶어 밖으로 나가니 모든 게 다시금 차분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방으로 돌아가 사진기를 들고 나왔다.
서더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보았다.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내면서 릭샤(Rickshaw) 꾼들이 나를 스쳐간다.
쉴 새 없이 내딛는 그들의 거친 발에는 아무런 것도 신겨져있지 않다.
어제는 그저 지나쳤을 뿐인 거리의 부랑자들을 천천히 살피게 되었다.
괜히 공기가 무겁다.
카메라를 몇 번이나 들었다 그냥 놓았다.
눈에 치이는 건 온통 가난한 부랑자들의 내밀어진 손과
끊임없이 신음하는 병든 자들의 모습들이었다.
카메라의 전원을 꺼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와 카메라가 총을 든 군인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안의 잔인한 폭력성과 끝없는 욕망이 세상을 해하는 것은 아닌지.
무의식이라는 비겁한 변명 속에 끊임없이 살아 있는 나의 의식을 다스리고 싶다.
언젠가는 그렇게 자유롭게, 그리고 진심으로 나의 삶이 시선과 일치하는 날을 만날 수 있을까.
인도는 거대한 나라다.
그리고 그 거대한 땅덩어리는 철도와 버스로 여기저기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악명 높은 연착과 여행자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갖은 이유들로,
여행의 루트를 미리 정해놓는 일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가진 시간과 여행자들의 정보를 종합해서 맞춰보니
아무래도 기한 내에 인도 전역을 돌아보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천천히 돌아보되
남인도로 내려가 다시 콜카타로 올라올 때는 비행기를 타기로 결정했다.
여행사를 서너 군데 돌아다녀본 후 가장 저렴한 곳에서 티켓팅을 했다.
올해의 마지막 즈음에 남인도의 첸나이에서 다시 이곳 콜카타로 돌아올 것이다.
미리 환전해 놓은 돈이 없어서 은행도 찾아야 했다.
은행은 뒷골목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는데, 아직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별로 한 것도 없이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숙소 근처로 돌아와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는 상점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낮에는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그리고 지금은 여행자들을 상대로 한 노점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음식이 입맛에 잘 맞지 않는다.
‘싸비’라고 본인을 소개한 인도인 청년이 바깥세상이 궁금한지 자잘한 질문들을 물어온다.
커다란 눈을 하고 연신 손동작을 섞어가며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본인 주변으로 하나둘씩 모으는 묘한 매력이 있는 사내다.
어느새 싸비와 나, 그리고 일본인인 미호 짱과 토헤이가 함께 보도블록에 걸터앉아 있다.
자신은 대화만이 필요할 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그의 끝없는 호기심을 어느 정도 충족한 뒤에 우리 모두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떠났다.
서더 스트리트에서 유명하다는 짜이(인도식 밀크티) 가게로 찾아가 연거푸 4잔이나 마셨다.
매번 도기(차를 담는 그릇)를 바닥에 던져서 깨는데, 괜히 묘한 쾌감이 있다.
숙소로 돌아오니 토사가 웬일인지 방을 깨끗이 정리해놨다.
침대에 기대앉은 그는 내게 가볍게 눈인사를 해주고는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맞은편 벽에 TV 뒤로 숨는 커다란 바퀴벌레가 보인다.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