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언니가 있는 캐나다로 엄마를 보낸지 벌써 17일이 지나, 오늘 드디어 엄마가 오후 5시 인천공항으로 한국에 들어온다
그동안 일하고 애키우며 가까이 있는 친정 엄마의 손길이 참 고마웠는데, 이번 엄마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업무시간 중간 중간 아이들 픽드랍을 위해 외출을 해야하는건 일도 아니였다. 퇴근하면 쌓인 빨래더미들과 너저분해진 아이들 방을 보고 있자면 한숨만 나올뿐. 마음을 나눠야 할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에 저녁 약속이 잦아지면서 해야할 일들은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이런 일들에 쉽사리 마음이 무너질 내가 아니였지만, 하나의 사건은 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한국에 놓고간 언니의 고양이를 캐나다까지 데려다주려고 시작된 엄마의 여행이였것만, 도착하자마자 저체온증으로 까미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땐, 엄마도 울고 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긴 비행시간이 나이가 많았던 까미유에게 무리일거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게 마음 써주지 못한 까미유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날은 마침 유난히 하늘이 맑았고, 아이들과 공원에서 신나게 놀고 있던터라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던것 같다.
마음이 연약할때, 멈출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마주할때면 더없이 무너졌다. 그깟 빨래더미, 그깟 너저분한 집안 살림, 그깟 출퇴근이 갑자기 한 순간 나를 집어삼켜버리는 그런것 말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회사를 다니며 이리도 힘겹게 살고 있는가,까지 생각이 미치면, 모든 의욕이 사라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어디 한두번 있었겠는가. 그럴땐 그냥 조용히 시간을 흘려 보낸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힘든 시간들을 흘려 보내다보면 다시금 삶의 작은 불씨를 잡기 마련인데, 회복의 순간에 마주한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의 글은 그래서인지, 형용할 수 없는 내 마음 어딘가의 건들수 없는 어떠함을 건들인듯한 기분이 들었다.
" 책이라면 손도 대지 않는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독서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누가 가난한 사람이고 누가 부자일까. 누가 죽은 사람이고 누가 산 사람일까?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이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들은 과묵한 무리를 형성한다. 이 사람들에겐 물건이 말을 대신한다. 돈이 있으면 가죽 좌석을 갖춘 차를 소유하지만, 돈이 없으면 레이스 깔개 위에 시시한 장식품이나 올려두게 된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버리고 대신 몽상의 영과 불길 같은 바람을 들여놓는다. 책을 읽지 않는 삶은 우리를 잠시도 놓아주지 않는 삶이다.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들처럼 온갖 잡다한 것들의 축적으로 질식할 듯한 삶이다. 문을 밀친 순간 쓰레기가 천장까지 넘쳐나는 걸 보게 되는 집 같다고나 할까. 돈이 있는 사람들의 흰 손이 있고, 몽상하는 사람들의 섬세한 손이 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는 손이라고는 아예 없는 사람들, 황금도 잉크도 박탈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오직 그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요컨대 타자를 지향하는 글이 아니라면 흥미로운 글일 수 없다. 글쓰기는 분열된 세상과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며, 계급체제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