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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온기가 살아있는 사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 그 이질적인 삶에 대한 고찰

by 작은 책방

작년 12월 아들의 유치원 겨울방학에 있던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책에서 눈여겨보던 서대문사 박문관에 가기로 했고, 한 번의 환승이 있음에도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아들이 버스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서울 갈 때 차를 끌고 가면 주차며 교통이며 너무 복잡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날은 날이 좀 풀렸지만 전날까지도 기승했던 추위에 바짝 졸아 우리는 털모자에 장갑, 그리고 겹겹이 껴입은 옷으로 온몸을 칭칭 감았다. 기다리던 버스가 왔고 아들이 먼저 버스에 타려고 했지만 버스 턱이 너무 높아 잘 올라가질 못했다. 나는 그런 아들을 안아서 올려주려고 했으나 뚱뚱해진 우리의 몸은 도저히 자연스럽게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지만 굼뜨고 서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버스 기사 아저씨는 빨리 올라오라며 읍박 아닌 읍박을 지르셨고, 나와 아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그 순간을 집중하였다. 겨우 계단을 다 올라와 버스카드를 찍으려고 하는데 인원을 2명으로 세팅해야 하기에 잠시 기다리라고 하는 사이 아들이 자리에 앉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버스를 거의 안 타본 나는 버스가 움직여 아들이 다칠까 봐 카드도 찍지 않은 채 아들을 잡으러 뒤쪽으로 갔다. 아저씨는 한번 더 읍박 아닌 읍박을 지르시며 카드 안 찍냐고 한 소리를 하셨고, 나는 그 순간 나의 병신력이 하늘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 파악한 아들은 조용히 버스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다 잠들었고, 나는 왕복 3번은 더 타야 할 버스를 어떻게 하면 빠르게 타고 카드를 찍는 행위를 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사실 이런 부당한 대우를 살면서 많이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 정도의 에피소드도 나에게는 가슴 쏠리고 긴장되는 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하물며 세상에 절대 소수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장애나 질병이 심하고, 다수가 혐오하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삶은 어떠할까. 자신의 삶 전체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그들에게 당신들을 존중한다고, 당신들의 삶이 숭고하다고 쉽게 이야기하는 건 대단한 위선이라 생각한다. 그들에게 마음을 쓰는 건 참 애매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내 삶이 아니니 눈감고 살자고 했던 지난 세월들이 애석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렸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약한 내가 하고 싶은 건, 긴 시간을 들여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섬세하게 도와주고 그것을 가만히 지나쳐주는 것, 그들 스스로가 나는 존엄하고 가치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게 이 세상에 온기를 흩뿌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나는 내 삶을 통해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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