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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Nov 18. 2022

아빠마저 우리 곁을 떠났다


| 2022년 11월 13일 일요일


오전 내내 비가 올 거라던 그날은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에 미리 비를 뿌리고, 잠시 뒤 동이 텄을 땐 이미 맑게 개인 하늘이 열려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두꺼운 옷을 껴입게 만들던 추위는 어디 가고 상쾌하게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아침부터 가슴을 설레게 했다.

벌써 끝나버린 줄 알고 아쉬워했던 가을이 아직 남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말로는 단정 지을 수 없을 갖가지 색들로 곱게 물든 나뭇잎들은 눈길이 닿는 곳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정신없이 불어대는 못생긴 바람이 아니었다.

한쪽 어깨로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주는 청순한 바람이었다.

바람을 따라 나뭇잎들이 흩날리며 낙엽비를 뿌려주고 있었다.

해가 구름에 살짝 가렸다가 다시 말간 얼굴을 내밀었다.

서늘했다가 따뜻했다가.

내내 내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은 유독 멀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가까운 병원에 모시는 거였는데.

가는 내내 온갖 후회로 번진 마음이 자꾸만 초조해졌다.

그런 마음에 들어온 창밖의 가을은 언제부터 그렇게 쓸쓸해져 있는 건지.

조금 전 나를 설레게 했던 그 가을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먼 길을 달려 겨우 도착한 병원에서도 아빠를 바로 만날 수 없었다.

위독한 상황이라고 했으면서 느긋하게 체온도 재고 코로나 검사도 하고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10여분을 기다렸음에도 아빠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뿐이었다.

식구가 많아 다 같이 아빠를 만나지도 못하고 2명씩 차례로 면회를 했다.

35kg이라던 아빠는 아기처럼 침대에 누워있었다.

작은 얼굴은 더 작아져서 열 오른 이마에 올려놓은 물수건이 무거울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숨을 내쉬는 아빠를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빠졌다.

한 달 전 면회를 갔을 때만 해도 아빠는 이렇지 않았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떨리는 손으로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곧 팔순인데 아직도 보들보들한 살결이 너무 뜨거웠다.

우리의 목소리가 들릴지 모르겠지만 들었으면 좋겠다.


| 아빠. 긴 세월 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낳아줘서 고마워. 큰언니랑 막내도 금방 올 거야. 그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


감사하게도 딸과 사위들의 인사를 모두 받고 아빠는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에게는 갑자기 닥친 이 날이 어쩌면 아빠에게는 조금씩 준비했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기억을 잃고 낯선 곳에서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많이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엇이 아빠를 위하는 걸까 수도 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상의해서 내린 결정인데 아빠가 떠나고 나서야 보인다.

아빠를 위한다고 했던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조건이 붙었다는 것을.

아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검은 상복을 입고 서있는 다섯 딸과 다섯 사위들. 그리고 여덟 명의 손주들.

우리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온 분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 그래도 다행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도 많이 든든하실 것 같아.


이제야 알겠다.

우리 엄마와 아빠가 조금 더 서두를 수 있었던 이유.

지금의 나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평생지기 친구가 넷이나 되는 것도, 그 덕에 팔자에도 없는 남자 형제를 넷이나 얻게 된 것도 모두.



부디 마음 아파하지 않으셨기를.

너무 쓸쓸해하지 않으셨기를.

40년도 더 지나버린 소여물 주는 기억 말고 딸내미 손 잡고 하나하나 사위들에게 넘겨주었던 다섯 번의 가슴 벅찬 기억,

손주들 재롱에 행복했던 기억,

먼저 떠나보내고 내내 그리워했던 아내를 기억하며 떠나셨기를.

당신이 남겨놓은 딸들 옆을 지키는 사위들과 손주들을 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흐뭇하게 떠나셨기를. 부디.


| 아빠. 잘 가. 고맙고 사랑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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