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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Oct 31. 2022

사고였어요, 자책하지 말아요.


| 애기 엄마! 정신 놓으면 안 돼요.

  애들 생각해야죠. 눈떠봐요, 제발!...


이제야 내 몸 구석구석 뜨거운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있는 힘껏 눈을 떴다.


| 아이 착해. 잘했어요! 조금만 더 참아요. 병원 거의 다 왔어요.

  남편 목소리 들리죠? 남편분 옆에서 운전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요


| 여보. 눈떠. 정신 차리고 있어야 돼. 여보, 여보?






토요일 아침.

남편과 둘이 운동을 하고 왔다.

골프는 우울증이 시작되면서 남편의 권유로 나란히 함께 시작하게 된 내 인생 통틀어 거의 유일한 운동이기도 하다.

처음엔 재미도 없고 의욕도 없어서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나가서 겨우 시간을 채우고 돌아왔는데 요즘은 재미도 재미지만 스스로 욕심도 나서 웬만하면 주말에도 꼬박꼬박 운동하는 편이다.

연습장에서 운동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우리는 옷을 하나 사러 가기로 했다.

운동을 잘하지 않는 탓에 그 흔한 트레이닝복도 잘 없는 나는 선선한 가을바람에도 아직 작년 여름에 장만한 얇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절복을 장만하러 들른 매장에서 추천해주시는 바지로 갈아입고서 거울에 나를 비춰보려 막 나오던 참이었다.


아얏!


제법 큰 내 목소리에 남편과 매장 점원 아주머니 모두 나에게 시선이 멈췄다.

나조차 영문을 모르고 아픈 손을 들어보았더니 오른손 손톱에 그새 진한 피멍이 들어있었다.

아무래도 피팅룸 문에 손이 끼인 모양이다.

손가락을 오므릴 수도 펼 수도 없었다. 다리가 풀릴 만큼 고통이 심했다.

점원 아주머니가 그 문이 제멋대로 잘 닫혀서 종종 손님이나 점원들도 손을 다치곤 했다 하시며 내가 문을 잡아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했다. 괜히 입어보라고 권했다며 어쩔 줄을 몰라하셨다.

아주머니의 잘못은 아니기에 억지로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은 했는데 이상하게 괜찮지가 않았다.

내가 좀 좋지 않아 보였던 건지 남편은 잠시 자리에 앉으라고 했고 의자에 앉자마자 속이 메쓰껍기 시작했다.

잠시 뒤 토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을 여쭈었지만 거기까지 갈만한 여유가 없었다.


| 아무 봉지라도 있으면 좀 주세요.


아주머니가 건넨 봉지를 입에 갖다 대고서 남편의 말에 따라 심호흡을 했다. 헛구역질이 계속 났다.

갑자기 심각한 현기증이 일었다. 손끝부터 점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손이 차가워지는 것 같다고 겨우 남편에게 말을 했고 내 손을 만져 본 남편은 깜짝 놀랐다. 아주머니는 따뜻한 물이라도 마시는 게 낫겠다고 다른 분에게 물을 부탁했고 물을 마시려 고개를 든 내 얼굴을 보며 두 분은 다급해졌다.


| 갑자기 안색이 왜 이렇지. 핏기가 하나도 없는데?


| 여보. 안 되겠다 병원 가야 되겠다.


그 순간 어지럼증에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내 목은 상모라도 돌리는 듯 멈춰 세울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생각하던 차에 다행히 내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에게 기대어 정신을 놓고 말았다.






눈을 슬며시 떴더니 아주머니는 달리는 차 안에서 내 볼에 자신의 볼을 맞대고 내 온몸을 주무르고 계셨다. 그것도 자리에 앉지도 못하시고 조수석에 앉은 내 뒤에 선 채로.

많이 놀라신 듯 아주머니는 거의 울고 계셨다.

얼음장 같던 내 몸이 서서히 열이 오르는 건지 땀이 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차가운 나의 두 귀를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비비고 또 비비시며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옷 하나 사러 갔다가 응급실에 실려온 나는 상표도 떼지 않은 새바지를 두르고서 심전도 검사를 하고 ct를 찍고 x레이를 찍고 피를 뽑고 침대에서 소변을 받았다. 팔에는 링거가 달려있었고 혈압이 너무 낮고 맥박이 약하고 느리다더니 이내 가슴에 차가운 긴 줄이 여러 개 붙여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컨디션이 정말 좋던 사람이었다. 멀쩡하게 밥을 먹고 운동까지 하고 온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응급실 침대에 누워 삐, 삐, 내 가슴에 연결된 기계소리를 듣고 있었다.

눈을 뜨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옆을 슬쩍 봤더니 남편이 내 손을 잡고 침대 가드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대대로 기독교인 집안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지금 여기서 기도라도 하는 건가.

이 사람도 많이 놀랐겠지.


검사 결과가 나오는 동안 슬쩍 잠이 들었다. 내 몸이 자꾸만 가벼워지는 나쁘지 않은 꿈을 꾸었다.

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갑자기 큰 고통이 와서 순간적으로 쇼크가 온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링거를 맞고 혈압이 평소보다 조금 낮았지만 남편과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잃고 넘어갈 때의 느낌이 너무 선명해서인지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 나의 핏기 없이 질린 낯빛을 본 남편 또한 마찬가지였다.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와서 십년감수한  남편과 둘이 깊은 잠을 잤다. 여전히 손과 발, 귀는 차가웠지만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것 같았다. 남편은 자다가도 생각났는지 나의 손과 귀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 아직도 좀 차갑네...


아이들의 고열에나 마음 졸여봤지,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일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일이 일어날 상황이 아닌데 참 별일이다 싶었다.

문에 손끝이 찍힌 것이 정신을 잃고 응급실까지 갈 일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면 어떻게든 일어난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밤새 세상모르고 자고 일어났더니 말도 안 되는 참사가 벌어져있었다. 곱게 피어난 꽃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지고 말았다니.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의 슬픈 소식은 없길 기도하며.


당신 탓이 아닙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고였을 뿐이에요. 자책하지 말아요.

서로를 아프게 하는 비난을 멈춰주세요. 그들도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그 마음에 따뜻한 위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루빨리 아픈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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