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봄
3학년 2학기의 설계 주제가 공동주택이라는 것을 느꼈을 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예감이 좋지 않았다. 2학년 1학기 설계였던 단독주택에서 나 자신에 대한 한계 아닌 한계를 느꼈고 그 일을 계기로 건축을 계속 전공하는 것이 맞는지라는 의문이 조금씩 들었기 때문이다. 공동주택이라, 지금까지 느꼈던 막막함과는 다른 차원의 막막함이다.
사람들은 각자 잘하는 것이 있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 또한 그럴 것이다. 어떤 친구는 말하는 것을 잘하고, 어떤 친구는 운동을 잘한다. 손재주가 좋은 친구도 있고 운동을 잘하는 친구들도 있다. 설계 분야 또한 그렇다. 주택 설계에 자신 있는 사람이 있고 문화 예술 공간에 자신 있는 사람도 있으며 공장이나 대공간을 설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 확실히 느낀 것은 나는 주택 설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설계를 시작하면 좋지 않은 점이 상당히 많다. 우선, 주택에 대해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진다. ‘나는 주택 설계를 상대적으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냥 주어진 대로 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은 설계를 하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위험하다. 레퍼런스, 선례, 컨셉, 아이디어 등 자신이 정말 ‘좋아해서’ 많이 찾아보지 않는 이상 좋은 사례를 찾기가 어려운데, 아예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으면 행동이 굉장히 수동적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과정 자체가 힘들다. 한 학기는 약 3개월에서 4개월로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매일매일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고 상상해 보면, 이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바꿔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자신만의 조미료를 만들어 거부감이 드는 음식에 조금씩 뿌려보면 적어도 그 과정이 고통스럽진 않을 거다.
사이트는 놀랍게도 저학년 때 내가 자주 갔던 망원동이었다. 망원동 안 사이트를 조사해 보니 대지 주변에는 저층 주거 개발지들이 즐비했고 경사도가 없기 때문에 한강에 대한 침수 우려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저층 주거들에는 60대 이상의 노인분들의 비율 (특히 독거노인의 비율) 이 많았다. 망원시장과 몇 개의 작은 공원들이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인프라의 전부였다. 물론 주택을 개조해 만든 소품샵이나 카페 등도 있지만, 이곳들은 대지 주변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용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일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거주민들을 위한 공동 주택을 구현해 보기로 했다. 현대 시대에 피할 수 없는 문제인 단절과 소외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람들이 우연히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관계의 공간들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상호 간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하고, 이와 동시에 기존의 프라이버시 또한 충분히 확보하고자 하였다. 사회적으로 해결하기도 어려운데 공간적으로 이 컨셉을 잘 풀어낼 수 있을까. ‘뭐 어때’ 라며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도전해 보기로 한다.
주요 컨셉은 퍼블릭과 프라이빗한 공간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전이 공간이다. 공동 주택이라 하면 공공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위계와 경계가 중요시되는데, 이러한 다양한 성격의 공간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전이 공간이 존재한다면 어떤 주택이 완성될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전이 공간은 유닛 안에 있으며, 유닛과 유닛을 연결한다. 마치 사랑방과 같은 개념의 공간이 복도를 지나가다 보면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전이 공간 옆 붙어 있는 공간에 따라 유닛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혼자 쓰는 프라이빗 기본 유닛, 그리고 기본 유닛을 바탕으로 한 거실 연계형 유닛과 주방 연계형 유닛이다. 필요할 때면 전이 공간들을 열고 닫으며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반 연계형 유닛에서 거주하고 있는 A라는 사람은 요리를 좋아한다. 자신의 요리를 이웃과도 나눌 때는 전이 공간의 문을 개방한다. 같이 요리도 하고, 한 테이블에서 밥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전이 공간에 들어와 이웃에게 ‘제 요리 좀 맛보시겠어요’ 라며 즉석으로 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전이 공간을 개방하는 정도에 따른 예상 시나리오도 존재한다. 전이 공간의 모든 문을 닫았을 때는 하나의 유닛 안에서 각각의 전이 공간을 제2의 거실이나 서재로 쓸 수도 있다. 이는 이웃과 소통하지 않을 때 쓰일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유연하게 유닛에는 개별성을 부여하고, 전이공간만 열어 거주자의 손님이 왔을 때 맞이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더럽거나 등의 이유로) 자신의 집에 손님들을 초대할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을 때는 이렇게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문이 개방된 상태다. 자신이 사는 방까지 다 보일 수 있는 거다. 이 상태라면, 보다 큰 넓이에서의 공동체 행사 또한 가능하다.
두 번째 컨셉은 전이 공간과 지역 사회를 연결시키는 커뮤니티 밴드이다. 건물 안에서의 입주민들의 공용 공간이며 전이 공간과 함께 사람들을 잇는다. 이들을 배치하는 과정에서는 우선적으로 기본 모듈인 3x3에서 중간에 코어를 만들었다. 전이 공간으로 진입할 예상 동선을 따라 전이 공간이 배치되고, 전이 공간을 잇는 공간들을 따라 복도가 만들어진다. 커뮤니티 밴드는 입주민들의 전용 공간인 2-8층에서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는 퍼블릭한 성격을, 지역 주민들까지 이용할 수 있는 1층에서는 세미 퍼블릭한 성격을 가지며 확장된다.
또한 커뮤니티 밴드는 전이 공간 및 야외 정원과 수직-수평적으로 연결된다. 수직적인 요소인 계단은 공동 주택 안의 세대를 적절히 묶여주는 기능을 하며, 커뮤니티 밴드를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요소들을 자유롭게 오가며 건물 안에 있는 헬스 케어 센터, 마인드 브릿지, 커뮤니티 박스 (노인정과 같은 공간이다), 문화 교실, 도서관 등을 방문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저층부에 여러 시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매스의 모델링은 직육면체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프로그램에 대한 매스가 강화되고, 커뮤니티 밴드의 성격이 잘 보이는 공간으로 설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설계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후회는 딱히 없다. 모든 걸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아직 주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역시 주거시설에는 사람의 삶이 담겨 있어야 하는구나.
사람의 삶을 담을 수 있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3학년 2학기 말이었다.
추신.특히 힘들었던 3학년 2학기, 함께 해 준 동기들이 있다. 이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같이 가구 공모전에 나가며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크리틱도 해 주었던 시간들이 즐거웠다. 가장자리에서 나를 꺼내주며 우리의 상황에 대한 깊고도 얕은 이야기를 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할 예정인 동기들 J, S, G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