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의 그때

네 번째 봄

by 새봄

회사원 A는 오늘도 지하철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이르고, 새벽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시간. 강남 길가의 네모반듯한 건물을 닮은 그의 가방 속에는 끼니를 때울 도시락통만이 겨우 들어간다.


몇 개의 역을 지나갔을까. 아침의 눈부신 햇살과 지하철의 어두운 공기가 반복되어 교차하며 그의 얼굴에 비친다. 역을 나오면 강남의 사무용 건물들이 눈앞으로 펼쳐진다. 그의 눈 앞에는 통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수많은 건물과 단색의 양복 차림으로, 무표정하게 어딘가로 걸어가는 사람들뿐만이 존재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새로운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삶.


그 속에서 그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다. 잡지에서 본 것만 같은 바닷가 휴양지, 푸른 초원 속의 그림 같은 집, 유럽 어느 섬나라의 성당.


회사에 도착해 캐드를 키면 단지 ‘현실 속의 어느 건물’의 도면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가 건축을 전공할 당시 설계했던 나름의 이상적인 건물들은 이 자리에 없다.

반복하고 반복해도 이상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고 무른 환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는 문득, 그가 대학 시절 즐겨 들었던 어느 한 노래의 가사들을 떠올린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건축은 그 시대의 결정이라고 했던가.

어느 유명한 건축가가 했던 말이다.


A가 늦은 나이에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꽤 이름 있는 건설사의 높은 직급으로 승진했었던 2020년대 초반, 그는 회사에서 밀레니엄 힐튼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매각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지어진 건물은 어느새 있는 듯 없는 듯,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로만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밀레니엄 힐튼 서울은 김종성 건축가가 미스 반데어로에라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에게 배운 현대건축의 정수를 고국에 구현한 건물이었다. 대한민국이 급성장하고 있던 그때 그 시절을 증명하는 바로 그런 건물.


‘가슴이 웅장하게 솟아오르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라는 바람을 이루고자 했던, 힐튼 호텔을 설계한 김종성 건축가의 심정이 그제서야 완전히 와닿았다. 투숙객뿐만 아니라, 호텔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생각한 공간을 설계하기까지의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A는 그가 호텔에 머물지 않아도 이따금씩 그곳에 방문했다.


김종성이 크라운 홀을 보고 소름이 돋았던 그때처럼, A는 힐튼을 보고 매번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A에게 힐튼 호텔이란 특별함 그 자체였다. 일 년에 한 번, 연말이 다가오면 그와 그의 가족들은 힐튼 호텔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기억 속의 힐튼 호텔의 로비 아트리움에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자선 기차가 있었고 학창 시절의 A는 매년 다른 컨셉의 기차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건축을 전공한 덕인지 힐튼 호텔이 주는 공간 그 자체에 시선이 갔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한 치의 고민을 할 새도 없이 아트리움이었다.


지하부터 2층까지 뻥 뚫린 아트리움이 특히 인상적이었지. 웅장한 느낌의 황동 색깔 기둥.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지하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크림색 계단. 그리고 계단 아래 한없이 반짝이는 원형 분수.


지금도 떠올려보면 참으로 아늑하고 단정한 느낌이 나는, 어떠한 종류의 아름다움을 가진 건물이었다.


아마도 환상의 결정체였을 것이다.





대학 시절의 A는 '작품은 곧 환상이다'라고 떠들고 다니곤 했다. 그 후에도 여러 번의 프로젝트를 마주하며 작품이 현실과 구분되는 이상적인 차이를 계속해서, 미친 듯이 쫓아왔다.


현실은 분명히 달랐는데. 힐튼은 건축적인 다양성이 부족한 서울에 부여된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진취적인 실험을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건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건물을 과연 헐어버려도 될까. A는 생각했다.


뼈대를 놔두고 증축을 한다는 것은 건축가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건물을 철거하고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시간적으로도 혹은 비용적으로도 이론상 더 효율적이다. 다행히도 힐튼 호텔은 건축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메인 로비를 보존하고, 재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그러나 특정 시기의 향기와 질감이 층층이 쌓여 있어야 도시의 풍경과 공기가 풍성해지는 것처럼 세상을 선도하는 도시 중 하나인 서울 안 우리 시대를 증거하는 건물을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대는 새로워야 한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도전하자



그렇다면 힐튼의 리모델링은 어느 정도로 이루어져야 할까. 아니, 애초에 이루어지는 게 맞는 걸까.


힐튼의 수많은 설계 도면과 그 종이에 담긴 한 사람 한 사람의 땀과 노력, 그리고 여러 가지 목표들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 처음에는 이런 자료라도 풍성하게 남아있음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A는 못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역사적인 건물을 실체가 아닌 문서 자료로만 기억해야 한다니.


더 이상 그곳에서 서울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없다. 물론 여러 멋지고 소위 ‘럭셔리’ 한 호텔들이 많지만, 역사적인 건물 공간 안에서 서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길 원했다.


A는 김종성 건축가가 어디선가 쓴 글을 떠올렸다.


'특정 시기의 향기와 질감이 층층이 쌓여 있어야 도시의 풍경과 공기도 풍성해진다. 힐튼 호텔의 입장도 이 상황에 정확히 부합하는 아젠다와도 같다.'


누군가가 A에게 "너희 나라에도 품위 있는 호텔이 있냐"라고 묻는다면, A는 주저 없이 "힐튼 호텔에 꼭 가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A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시민도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곳은 그만큼 일반적이지 않은 공간이다. 오래됨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건물 그 자체였다.


어떤 존재가 사라진다는 건, 그것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사라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A는 실소했다. 나는 환상만 좇고 있으면서 정작 내 삶은 그와 멀어졌구나. 마침내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단 한 순간이라도 노력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지금의 삶에 자신도 모를 안정감을 느끼는 그 마음이 미워졌다.


'넌 닿지도 않는 환상을 좇으며 평생 고통받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누군가가 속삭였다.


'나는 아름다운 환상을 바랐을 뿐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쩌면 환상이란, 우리가 지금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A는 그때를 생각하며 마우스의 클릭 버튼만 연신 두드린다.

이전 24화여행의 이유 그리고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