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그리고 대답

네 번째 봄

by 새봄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여행의 이유, p207』


-프롤로그


여행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세계 곳곳을 다니는 것이 막연한 목표기도, 바램이기도 했다. 하지만 환상은 그저 환상일 뿐. 나의 일상은 환상과 거리가 꽤나 멀었다. 건축을 전공하는 일련의 대학생 중 한명으로서 지난 4년간 매 순간 집->설계실->집->설계실의 루트가 반복되었다. 학기 중에 놀 법도 한데, 어딘가로 마음 놓고 떠난 적이 손에 꼽는다. 이번 주는 ‘설계 최종 마감’ 날, 다음 주는 ‘공모전 마감’ 날, 그다음 주는 ‘전공 시험’ 등의 이유로 말이다. 여행을 가면서 국내와 세계 곳곳을 제약 없이 보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지만 그걸 실현하는 것이 꽤나 쉽지 않았다.

도대체 여행이 뭐길래, 사람들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리는 걸까.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으며 가지게 된 여행에 대한 소소한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을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적어 보았다.


01 부산 흰여울문화마을, 다대포해수욕장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 즉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했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 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다양한 방식으로 여행을 향유한다. 요즘 들어 흔히 말하는 ‘호캉스’ 나 몇 달 동안의 세계 일주, 주말이나 방학 며칠을 빌려 국내나 해외에 일찌감치 다녀오곤 한다.


어디론가 떠났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여행의 본질적인 의미를 전제로 둬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사는 동안 많은 여행을 했다. 집 앞 카페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열 몇시간을 가야 하는 반대편의 대륙까지, 거리부터 여행의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행을 ‘왜’ 가는지보다 ‘어떻게’ 가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 또한 ‘여행을 간다’라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여행 계획과 예산을 짜다 보면 어느새 내가 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나 본질은 흐려졌다.


그렇다면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 떠난 부산 여행에서 그 답을 찾았다. 프로잡담러 K에게 여행의 목적은 힐링도,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배움도 아니었다. 바로 무언가를 덜어냄으로써 여유를 얻는 것이다. 각자 여행의 스타일은 다르겠지만 국내 여행을 갈 때만큼은 한곳에 계속 머물면서 여유를 찾는 편이다. 물론 해외로 건축물을 보러 다닐 때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날은 24년 2월의 어느 날이었다. 부산 영도의 흰여울문화마을을 거닐다가 카페에 들러서 책을 읽고, 또 바다를 보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했다. 하늘이 흐려서 그런지 바다와 하늘의 수평선의 경계는 희미하기 그지없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이 검은 바다만 펼쳐졌다. 그러나 일 년 만의 바다와 여행은 일상에 지친 사람을 여유 속에 가둬놓기에 충분했다. 맛있는 우유 아이스크림을 판다는 카페가 보여 그곳 2층에 자리를 잡았다. 거의 60도가 되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감에 대한 보상으로 바다 전망이 보였다.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 대신 새로 산 책 중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읽기 시작했다. 여행에 와서 웬 책이라니. 돌아다녀도 모자랄 시간인데 말이다. 이 상황이 모순적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책을 반쯤 읽었을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카페에 사람들이 가득한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책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숙소로 체크인하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카페의 옥상에 올라갔다.


그 순간 흐렸던 하늘은 맑은 바다와 하늘의 구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여행지에서의 날씨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도 같이 느껴졌다. 좋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다 보면 상황이 좋아지겠거니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알아가야겠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문득 조금 전에 읽었던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 중 한 문장이 떠올랐다.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행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가다 보면 인생을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새로운 해답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행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얻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인이 원하는 것, 여행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을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완벽하게 정의할 필요가 없다. 인생 자체도 여행이라고 본다면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를 때는 일단 도전하고, 그 사이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고, 어쩌면 진짜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얻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음 더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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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의 ‘현재’란 무엇인가


흰여울 문화마을에서 호텔이 있던 중앙역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약간의 오래된 풍경의 정취가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숙소에서 한숨을 돌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4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저 노을이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로 해운대도, 광안리 해수욕장도 아닌 숙소에서 가장 먼 다대포해수욕장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하철을 타고 약 스무 개 정도의 역을 지나쳐 종점인 다대포해수욕장 역에 도착했을 때는 또 하루의 해가 저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반신반의하며 역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자마자 보였던 풍경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시간 속에 오랫동안 바다 주변을 걸었다. 낮에 보았던 흐린 날씨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하늘과 바다가 오롯한 일몰 속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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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그러한 현재를 즐기기로 했다.


현재란 무엇일까. 내가 잠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와 약간은 서늘한 공기로 둘러싸인 일몰의 시간을 온전하게 즐기고 있다는 것. 여행에서의 미래는 잠시 접어두고 현재에 집중했더니, 자연스럽게 여행을 떠나기 전의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현재 가장 중요한 이 시점에 과거와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익숙한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우리는 항상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익숙한 상태로 살아간다. 내가 살아온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일상이자 인생이다. 그러나 여행을 할 때면 미래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게 된다. 여행지에서는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지에 대한 ‘현재’에만 집중한다. 일상에서는 아무래도 오직 현재만을 살긴 힘들다. 저자는 여행지에서의 ‘오직 현재’의 경험이 일상을 환기시키고, 그것이 일상을 더욱 의미 있게 구성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것이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02 미국 보스턴과 뉴욕, 그리고 시라큐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이유, p132』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작년 8월, 재학 중인 과에서 방학에 주최하는 도시 연구 워크숍과 미국 동부 3개의 도시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미국의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열리는 발표회를 위한 추가적인 준비를 위해 방학에 매일매일 학교에 가며 도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인지, 교수님께서는 미국의 시라큐스 대학에서 발표회를 하기 전에 보스턴과 뉴욕으로의 답사를 기획하였고 그 김에 미국의 여러 도시와 건물을 함축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과연 미국이란 곳은 어떨까. 나에게 그곳은 정말로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책이나 잡지에서만 보던 풍경과 얼마나 다른 느낌일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여행 하루 전. 평소 어딘가로 떠날 때의 하루 전과는 사뭇 달랐다. 설계실에서 연구 자료 마감을 하느라 여행에 대한 기대를 느낄 새도 없이 분주했다. 다음 날 공항의 게이트 앞에 도착하니 갑자기 '이제 한국을 잠깐 떠난다' 는 실감이 났다. 어느새 달라져가는 비행기 밖의 풍경에 나는 바깥으로의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두 번의 환승 끝에 미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실물로 처음 봤을 때였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건축을 전공하는 나한테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실물과 내가 생각하는 어떠한 환상과는 (좋은 의미로) 거리가 있었다. 계속 책에서만 보던 건물을 실제로 본다면 당연히 비슷한 느낌, 익숙한 곳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스케일의 공간이 한곳으로 모이는 듯한 강력한 건축적인 언어가 느껴졌다. 어쩌다 보니 미술품을 위주로 구경하기보단 벽을 따라 나선형 경사로를 돌면서 이곳저곳 둘러보게 되었다. 연속적인 바닥이 층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 채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것이 다양한 공간감을 주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약 30m 높이에 있는 아트리움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이것 또한 열린 미술관의 느낌이 나게 하는 요소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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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특히 뉴욕은 참 신기하면서도 현실과 환상의 거리가 있는 곳이다. 건축을 전공하는 프로잡담러 K가 본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건축물뿐만이 아니라 도시 조직에서도 그렇다. 계절마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가로수와 어우러지는 정돈된 길이 있는 반면에, 공사 중인 상태와 희미한 마약 냄새가 나는 음산한 길. 밤이면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모이는 만큼 사람이 많은 타임스퀘어와 달리 거기서 몇 블록만 더 가면 느낄 수 있는 인적이 드문 골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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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약 3만보 가량을 걸으며 8일 동안 많은 명소와 회사들을 오갔다. 체력은 점점 바닥이 났고, 밤마다 호텔 방에서 작업을 하며 밤을 새운 날도 다반사였다. 낮에는 거리를 활보하고 밤에는 연구 작업을 한 셈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관광과는 약간 다르지만, 고생하며 얻은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은 지금의 내가 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 같다. 짧은 미국으로의 여정이었지만 세 도시의 장소, 사람들, 삶, 그리고 문화를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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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큐스에서의 발표를 마친 그다음 날, 여느 여행자들과 같이 나 또한 나만의 추억과 경험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누워서까지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는 나날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직접 '여행' 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 장소에 직접적으로 방문하고 싶은 걸까. 단순히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디로 가면 무엇이 유명하다' 라는 사실은 누구나 똑같이 인지할 수 있지만, 그곳을 두 눈으로 담고 온몸의 감각으로 새롭고 다양한 요소를 느끼다 보면 각자만의 경험을 내면화할 수 있다. 그 내면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써가기 위해 인간은 여행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에필로그


여행을 가면 짧은 기록들을 어떤 식으로든 남기는 편이다. 소중한 하나하나의 기록들은 나에 대한 문장이 되고 마침내 한 편의 따뜻한 글이 된다. 여행의 프롤로그와 본론이 있다면 여행을 한 후 기록하는 에필로그의 작업 또한 중요한 여행의 일부다. 누군가는 사진으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다이어리에 짧은 에세이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다.


여행담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 중에 하나이다. 주인공은 늘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난다. 탐색의 대상은 주인공이 인생 전부를 걸 만한 것이어야 한다. 로널드 B.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중 '추구의 플롯' 에는 두 가지 층위의 목표가 있다고 했다. 주인공이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이다.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달성하도록 하여 관객에게도 깊은 만족감을 주는 것이다. 추구의 플롯의 이런 목표들을 여행기에 대입해 보면, 여행의 안전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여행지의 정보, 숙소 예약, 이동 수단 등 일정들을 꼼꼼히 검토하는 것은 안전하게 귀한하고자 하는 외면적 목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 즉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내면적 목표가 동시에 있다. 이러한 두 번째 목표는 대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각성, 대체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이처럼 인간은 다양한 이야기를 써가기 위해 여행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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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여행은 닮아 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고, 하고자 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의미 있다. 여행을 한 후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게 된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여행은 필요하다. 특정 장소를 찾아가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도시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크고 작은 여행이 우리의 삶에 또 다른 원동력을 주고, 향후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신만의 여행기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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