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읽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나무꾼이 살았습니다. 나무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사슴이 급히 다가와 자신을 숨겨달라고 애원하죠. 나무꾼은 사슴을 자신의 나무 덤불 속에서 숨겨주어 사냥꾼을 따돌립니다. 사슴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나무꾼이 고마워서 나무꾼에게 소원을 묻습니다. 나무꾼의 소원은 '예쁜 색시를 얻어 결혼하는 것'이었지요. 사슴은 보름날 계곡에 가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목욕을 할 테니, 그중 한 명의 날개옷을 훔친 다음,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선녀를 잘 보살피면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어요.
사슴의 말대로 날개옷을 훔친 나무꾼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선녀와 결혼해서 아이를 두 명 낳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늘 하늘나라가 그리웠던 선녀는 늘 눈물로 밤을 지새웠고, 나무꾼은 선녀에게 날개옷을 보여주고야 말았죠. 선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개옷을 입고 자신의 아이 둘과 하늘나라로 올라갑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잃은 슬픔에 빠진 나무꾼에게 이번에도 사슴은 조언을 합니다. 계곡에 가서 두레박이 내려오길 기다렸다가 그것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라고 말이죠. 사슴의 말은 이번에도 맞았습니다. 하지만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에 오른 나무꾼은 홀로 계신 홀어머니가 그리웠습니다. 아내는 나무꾼에게 천마 한 마리를 주며, 이 말을 타고 다녀오되, 절대 말에서 내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아들을 오랜만에 만난 홀어머니가 어찌 그리 쉽게 아들을 보낼 수가 있었겠어요.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갈 아들이 행여 배고플까, 아들이 좋아하는 죽 한 사발을 말 위에서 먹게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뜨거운 죽을 천마에게 쏟는 바람에, 놀란 말이 나무꾼을 떨어뜨리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답니다. 하늘을 향해 목놓아 울던 나무꾼은 병들어 죽고 말았고, 수탉으로 다시 태어나 늘 하늘을 보고 울부짖었다고 하네요.
'선녀와 나무꾼' 설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내려 와, 민간에게 널리 퍼져 있는 설화입니다. 뚜렷한 작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결말이 약간씩 변형이 되기도 하는데,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간 선녀 이야기에서 마무리되기도 하고, 나무꾼이 두레박을 타고 올라가서 재회한 뒤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가 있기도 하지만, 사실 제일 널리 알려져있는 결말은 바로 위 이야기입니다.
7살 된 큰 아이는 마음이 여린 구석이 있어서 아직도 조금만 무서운 장면이 있으면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조금만 슬픈 장면이 있으면 주인공이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러니 아이에게 읽어준 '선녀와 나무꾼'은 아이에겐 다소 파격적인 새드 앤딩이었나 봅니다. 뜨거운 죽을 말에 떨어뜨리는 부분에서는 아예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나무꾼이 수탉으로 태어나는 장면에서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고요.
뭐 이런 이야기가 다 있어. 이상해 엄마.
아이는 아무래도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아이는 홀어머니를 말에 태우고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갈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될 줄 알았던 거죠. 뭐 이런 이야기가 다 있냐니, 읽어준 사람이 참 머쓱해졌어요. 아이는 딱히 원하진 않았지만, 아이와 함께 다시 이야기를 되짚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딸, 그런데 말이야. 나무꾼이 선녀 옷을 훔쳤잖아.
응. 계곡에서. 몰래.
그때. 선녀 옷을 훔치는 나무꾼의 마음은 어땠을까?
슬펐을 거야.
아이의 대답이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두근두근 떨렸을 거야.'라거나 '무서웠을 것 같아.'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었거든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야 하니, 누군가에게 발각될 수도 있다는 마음에 긴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었어요. 그런데 아이의 대답은 '슬펐을 거야.'였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해 물었습니다.
사슴이 나빠. 사슴이 훔치라고 시켰잖아. 나쁜 걸 알려줬어.
순간 왠지 사슴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예쁜 색시와 결혼하고 싶은 소원을 가진 것은 다름 아닌 나무꾼이었고, 사슴이 알려준 방법이 그르다고 생각했다면, 훔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그 방법이 나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면, 예쁜 색시를 얻기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했어야 하죠. 사슴이 시켰기 때문에 '슬픈' 마음으로 도둑질을 한 건, 나무꾼의 잘못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럼, 훔치지 말았어야지. 아무리 사슴이 시켰어도. 그건 나쁜 방법이니까 안 훔치면 되잖아. 안 그래?
그건 그런데... 나무꾼은 다른 방법을 몰라.
아이는 나무꾼은 이루고 싶은 확실한 소원 한 가지가 있고, 도무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자, 사슴이 알려준 방법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정도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어른이어야, '사슴이 시킨다고 그걸 하니? 잘못된 방법이면 애초에 하질 말아야지. 슬퍼할 거면서 왜 하는 건데?'라는 생각이 가능한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는 능력이 어른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아이의 눈에는, 사슴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흔히 '아이들'을 비유할 때 우리는 '하얀 도화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느 것에도 아직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백색 도화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대변하곤 하죠. 문구점에서 산 하얀 도화지가 행여나 구겨질까 살짝 말아 소중히 품에 안고 교문을 들어가던 어릴 적 등굣길이 생각납니다.
시간이 흘러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그리고 저 또한 아이들을 낳아 키워보니, 아이들은 하얀 도화지가 맞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 또 거기에 어떤 색깔을 입히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은 참 제각기 다르고, 종이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종이를 오려서 작품을 만드는 아이도 있고, 또 접어서 작품을 만드는 아이도 있지요. 하얀 도화지를 앞에 둔 아이들에게 편견은 찾아보기 힘들 만큼 순수합니다.
내가 어른이니까. 내가 아이보다는 훨씬 세상을 많이 살았으니까. 아이는 어리니까.
이런 이유로 아이에게 지시하고, 명령할 때도 많음을 고백합니다. 어른이라는 말에는 꽤 무거운 권위가 숨어있어서, '어른'이라는 이유를 대면, 아이들은 곧장 순응하는 경우가 많아서 지도가 쉬워지니까요. 그 알량한 권위를 이용해 아이들을 지도한 적이 종종 있습니다. 검정 도화지 위에 파란빛을 내기보다, 하얀 도화지 위에 파란빛을 내는 것이 훨씬 쉬운 것처럼... 아이들의 하얀 도화지에, 내 마음대로 내 빛깔을 내려고 한 적이 있어요.
날개옷을 훔치면서도 슬펐지만, 사슴이 알려준 방법이 그것 뿐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아이의 반응에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슴이 날개옷을 훔치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알려주었더라면... 차라리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에 나무꾼에게 용기와 응원을 주기만 했더라도 나무꾼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수탉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소원이 있겠지요.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겁니다.
소원을 이루는 가장 빠른 방법을 혹시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겐 신중해야겠어요.
적어도 그 방법이 옳고 그른지를 아이들이 판단할 수 있기까지, 기다려주는 어른의 역할.
아이들이 스스로 그 방법을 찾도록 길을 밝혀주는 역할.
어쩌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할지도 모르니까요.
초등교사. 김수현.
닉네임. 달콤맘.
맘스홀릭 엄마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블로그. [달콤맘의 달콤한 육아, 달콤한 교육] 운영 중.
http://blog.naver.com/ggorygg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