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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pr 02. 2018

전진하는 봄



매일 걷는 길에서 드문드문 핀 개나리를 봤다. 개나리는 감정을 참지 않고 터뜨리고야 마는 아이의 웃음을 닮았다. 개나리는 왠지 예쁘다는 말보다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드는 꽃이다. 무채색의 거리에 하나 둘, 작고 노란 빛깔이 번져있다.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있는 목련은 벌써 꽃망울을 터뜨렸다.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목련 꽃 날아갈까 봐/발소리를 죽인다.’라고 노래하는 시의 구절이 있다. 발소리를 죽일 만큼 꽃 피는 장면을 목격하듯 바라볼 수 있는 건 오직 봄이라서 가능하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망울과 초록 잎을 바라보면 자연의 엄숙한 순환만큼 완전하지 못한 나를 보게 된다.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평범해진다. 그리고 그 평범함의 본질은 연약함이다. 생동하는 자연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바람, 먼지, 비, 어둠과 빛을 받아들임으로써 감내하는 인내를 말과 글처럼 소리 내고, 베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온갖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 또한 연약함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일까.


봄의 증거를 찾으면서 천천히 걷다 보니 머릿속에 꽉 찼던 생각의 무게가 줄어든다. 멈춰 있을 때와는 달리 걸을수록 정신이 맑아지면서 걷고 있다는 순간에만 집중하게 된다. 한쪽에서 할머니가 여린 쑥을 능숙하게 캐고 계셨다. 옆에 놓인 검은 봉지가 한눈에 봐도 두둑해 보였다. 뒤편으로는 만개한 개나리가 죄다 할머니의 조연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군가의 저녁 식탁에 봄이 오를 거란 생각을 하니 엄마가 이맘때쯤 끓여준 봄 쑥국을 먹고 싶어 졌다.  


개나리를 보면 중학교 때 키우던 카나리아가 생각난다. 매일 아침 카나리아의 청아한 소리에 깼다. 그 소리에는 특유의 리듬이 있는데, 한 장단을 뱉고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뒤로 갈수록 짧은 보폭으로 길게 빼는 소리였다. 딱히 지어준 이름은 없지만 자주 들락거리며 모이도 주고 물도 갈아줬다. 강아지처럼 쓰다듬어 주고 싶기도 했다. 우리 가족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중에 베란다에 들어가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었다. 새끼까지 낳았으니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셈이다. 카나리아는 알을 낳기 전에 참 부지런히 움직였다. 새장 안이 온전한 자신들의 왕국인 양 쉬지 않고 마른 가지와 떨어진 깃털을 주워 둥지를 최고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아빠는 보양식으로 지렁이도 잡아다 줬다. 아쉽게도 나중에 태어난 새끼는 다리가 두 개가 아닌 한 개였고, 너무 빨리 떠나버렸다. 엄마는 동물은 벌레도 먹고, 자연에서 적응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새장에 가둬 키워서라고 했다. 더 늦기 전에 자연으로 보내야 했다. 더 이상 카나리아의 노랗고 귀여운 머리와 물을 마시는 작은 부리를 보고, 맑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어느 봄날 아침, 우리 가족은 베란다에 옹기종기 모여 문을 활짝 열고 바깥을 향해 빗장을 올렸다. 탈출의 기회를 본 카나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약했다. 크게 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다. 텅 빈 하늘을 바라보는데 햇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가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작은 새장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넓은 세상에서 더 신나게 지냈을 거다.


새장에 살면서 카나리아는 아파트 베란다 너머의 세상을 바라기는 했을까. 아무래도 매일같이 소리를 내고, 가공된 모이를 먹고, 털을 고르고, 잠을 자면서 하루하루를 적응했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적응한다는 것은 그저 살아간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계절의 마디에서 자연과 생물이 살아가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듯 주어진 삶을 본능적으로 살아낼 뿐이다. 가끔은 자연의 본능을 닮고 싶다. 이성과 감성은 다 물리치고 그저 묵묵하게 피어나고, 맺고, 바래다 나중엔 미련 없이 떠나고도 싶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I hope for nothing)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I fear nothing)

나는 자유롭다. (I am free)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한 인간의 궁극적 자유가 새겨져 있다. 단 세 문장으로 그는 세상에 시를 남겼다. 자연의 일이 그러하듯 그의 초연한 삶의 자세는 다시 시작되는 계절 앞에 선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한다. 그러나 온갖 생명이 움트는 봄날, 다시 뭐든 시작해 보라고 재촉하는 계절 앞에서 무엇이든 바라게 되고, 바람으로 해서 두려울 것이고, 그 과정은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봄이라는 계절은 낡아가는 사람을 붙들어 전진한다.


지난여름, 비가 갠 후 온통 푸른 잎으로 가득했던 은행나무 고목을 바라보면서 써 둔 메모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바람 부는 대로, 비 오는 대로 모든 계절을 맞고 싱그러워져야지. 더 담담해져야지. 섬광 같은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건강하게 그렇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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